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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 그대가 있는 곳에서 하늘이 보이오? 어떠한 색이오? 그대의 마음에 차는 색이던 아니던, 하루에 두어번 쯤은 하늘을 봐주시오. 아니면 이틀에 두어번도 좋고. 내가 입을 맞춘 하늘이오.


하! 낮간지럽게. 벨져는 코웃음을 치곤 유려하지 못한 필체를 잠시 노려보았다. 입에 발린 말을 늘어놓으면 어설픈 해명이 완성된다고 철썩같이 믿나 보지. 받는 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릭 톰슨은 순진하게도 'Sincerely'로 편지를 맺을 때까지 아둔한 그의 감상과 그가 벨져를 만나지 못해 얼마나 상심하고 있는지로 활자를 채웠다. 벨져는 그 편지가 꽤나 우습다고 생각했다. 어디든 마음이 차면 바로 갈 수 있는 자의 취미가 커다란 철물이 며칠밤을 꼬박 새야 하는 편지 부치기라니. 만나지 못한다고 말하며 만나지 않으려 하는 상대가 참으로 그랬다. 벨져는 멋도 모르고 놀리는 그 혀를 꽉 깨물고 싶었다. 멱살을 쥐고 그 상판에 당황이 가득 차오를 때까지 뾰족한 말을 뱉고 싶었다. 그는 짜증에 차서 습관처럼 허리께를 짚다가, 자신이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도 릭 톰슨의 옷 한 자락도 제 눈 앞에 두지 못한다는 걸 깨닫곤 더더욱 마음이 꼬여 엄지손가락으로 검집을 쓸었다.


그대의 웃는 모습이 선하군.


그럼에도 이 말도 안되는 종이를 갈갈이 찢어버리지 못한 건, 릭이 멋도 모르고 놀리는 그 문장 때문이었다. 결국은 또 이렇게 그 얄팍한 술수에 넘어간다. 벨져는 그답지 않게 꾸역꾸역 감정을 삼켰다. 양껏 흉폭하게 굴고 싶다가도 사소한 문제로 매달리는 것이 모양 좋지 않았다. 그는 제 감정이 서운함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것을 베었다.


릭 톰슨의 영양가 없는 문장이 어설픈 효력을 발현할 수 있었단 건, 그것이 릭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걸 자연스레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벨져는 릭이 그의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하는 것이나, 소녀 행색을 내며 발간 하늘에 입을 맞추는 것이나, 모두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숨결의 미미한 온기나 선명한 입꼬리 같은 사소한 것도, 전부.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모르는 동양 사상을 열심히 설명하다가, '내 손 아래 있는 것도 하늘이라면, 그대 숨결도 하늘이겠군!' 이라는 말도 안되는 깨달음을 밝히며 요령없게 웃을 것이다.


벨져, 오늘은 노을을 보았소?


매섭게 외면하려 해도, 하찮은 말 하나하나가 눈 가에 머리 속에 잔상으로 남았다. 벨져는 눈 가를 찌푸리긴 했지만 종이에서 시선을 아예 떼지는 않았다. 벨져는 봐주는 셈 치고 고개를 돌렸다. 커튼 사이로 소리없이 흐르는 노을은 그의 눈에 태연하게 고였다. 노을은 낡아빠진 코트를 주워 입곤 맞지 않는 시계 여러개를 손목에 차더니, 변명하는 이 치곤 맑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와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벨져. 벨져 홀든.
나의 도련님.


노을은 눈이 부시지 않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다. 단지 마음이 부실 뿐이다. 벨져는 한숨을 쉼으로 이 감정을 모두 내뱉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시금 시선을 돌려 말끔한 동작으로 편지를 갈무리 했다. 그리곤 가장 밑 서랍을 열어 그곳에 떨어뜨리곤, 망설임없이 서랍을 밀어넣었다. 이미 모든 활자를 외운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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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

 

 

 

 

 

 

 

 

 

 

 

 

 

 

 

흐릿한 등이 밝히는 주점 안은 온갖 향기가 버무려져 있었다. 향유에 절인 기름종이 쪽이 조금 더 취향이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예민한 후각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강렬한 향기인 알싸한 술 냄새를 풀어내면 따끈한 국물 내음과 고깃기름냄새를 쉬이 찾을 수 있었다. 와인이 값비싸 맥주에 달음질한 고깃덩어리들, 향신료가 값비싸 꺾어온 톡 쏘는 향의 이파리들, 상기된 뺨의 아낙네들이 가져온 여러 과일들. 온갖 음식들은 사람들의 기대어린 눈망울들과는 상반되게 썩 좋은 품질은 아니었다. 요컨대, 식량이 없는 판국에 아끼고 아끼다가 겨우 낸 음식들이다. 바닥을 들어낸 항아리를 걱정하지 않는 웃음소리와 근래 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던 팔팔 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눈과 귀에 담으며, 남자는 쉬이 추론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거둔 승리였다. 마을에 발을 딛기만 해도 희망이 혀에 감도는 듯 했다.

 

 

흠. 남자는 덩달아 들뜬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어찌되었던 간에 소문만은 사실이었군. 품 안의 금화들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즐거운 소음에 묻힌다. 이 돈은 옆 마을 몫이 되겠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가, 이곳의 술이 입에 맞을지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고민을 길게 끄는 유형이 아니었다. ‘외출’할 때의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들을 경쾌하게 튕기자 금화 하나가 높게 공중제비를 뛰었다. 남자는 당연하고 가볍게 금화를 제 손바닥에 착지시키며 소소하지만 근사한 순간이 온전히 제 것이라는 듯 굴었다. 행주로 술잔을 닦던 소녀가 감탄을 숨기지 못하는 걸 부드럽게 보며, 그는 말했다.

 

 

“아가씨, 아무거나 한 잔 주시겠어요?”

 

 

 

곧 술이 들어갈 목소리가 이유 없이 지저귀는 것 같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남자는 정말 말도 안 되게 큰 잔을 보고 난감하게 웃었다. 한 번에 해치우긴 글렀군. 그는 술잔 속을 내리보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탁한 표면에 둥둥 떠 무심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영웅님이 말이지! 그때 따악-드래곤과 함께 도착했단 말이지! 남자는 무미건조한 표정을 술잔에 털고 조금 더 흥미로운 이야기에 정신을 쏟도록 마음먹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도 텅 빈 시선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심한 감상이군. 한 모금을 들이키려던 것이 이어이어 꿀꺽꿀꺽 넘어간다.

 

 

그러니까, 그때 영웅님이 오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사람의 대부분이 지금 황천행이란 말이요. 아무렴! 그 건장한 분도 정말 호탕하셨지. 난 그렇게 빠른 도끼는 처음 봤어! 도끼가 뭔가, 도끼가? 그걸 도끼라 부르는 자네도 참, 촌놈이군 촌놈이야. 그럼 네놈은 그게 뭔지 아나? 쩍, 하고 가르면 그게 도끼지 뭔가. 아, 사람만한 도끼가 어찌 도끼인가?

 

 

남자는 픽 웃었다. 드래곤에, 사람 몸만 한 도끼에, 아주 개성 넘치는 조합이다 싶었다. 사실은 반쯤 괴상한 과장으로 치부했지만, 뭐 썩 재밌는 이야기였다. 그럭저럭 술안주 삼을만한.

 

 

그런데 진짜 드래곤이란 말인가? 드래곤이 인간과 함께 다니다니? 참, 내가 봤대도 그래. 몸집이 산만 해서 여기 있는 사람이 거진 보았을 터네. 자네 말을 믿을 수 있어야지. 저번에는 엘프도 봤다고 하지 않았나? 우스워서 진짜. 내가 허풍을 친다는 겐가? 진짜 영웅들은 그렇다니까? 내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진 믿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 영웅들은 벌써 떠났는가?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감칠맛이 입 안을 감돈다. 남자는 입맛을 다시며 왁자지껄한 주민들을 훑었다. 수많은 정보가 휘몰아친다. 남자는 습관처럼 머릿속에 정보를 빼곡히 적었다. 술내가 나긴 나지만, 언젠간 쓸모가 있겠지.

 

 

그래, 정말 영웅들이 벌써 떠났나? 제 본질 중 하나인 호기심이 능글맞게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 묵을 곳 하나, 공터 하나 없는 이곳을? 듣자하니 좋게 말해서 영웅, 나쁘게 말해 정치적 입지 하나 없는 외톨이 집단이 변변찮은 포션 조달도 없이? 하긴, 실력이 거의 괴물 수준인데다가 그 ‘드래곤’을 타고 다 같이 날아간다면 또 모르지만. 머릿속으로 다시금 읊어도 우스운 내용이라, 남자는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굳이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또 궁금한 것이라, 남자는 심심풀이 삼아 을 떴다. 기이한 빛이 홍채에 유려한 문양으로 발하자, 남자의 시야 속에도 사람들이 휘감은 마력이 제각각 선명하게 보였다. 주점 안의 사람들은 거진 평범한 수준의 청색과 홍색, 녹색과 갈색을 띄었다. 확실히, 이 사람들만으로는 근래의 몬스터를 쉽게 상대하진 못하겠군. 남자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곤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강렬하고 공격적인 금빛 마력은 노려보고 있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고요하게, 주변을 가늠하며, 아직은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 아니 이빨을 드러낼 필요조차 없는 집요하고 정확한 시선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힘을 생각하면 한없이 뻗어나갈 법도 한데, 답지 않게 정갈하게 경계를 지켰다. 기가 질릴 정도였다. 여태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무색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사람들에 가려진 주점 구석으로 걸음을 향했다. 이 자는 필시, 그 대단하신 영웅이거나, 아니라면 적어도 대단한 실력자일 것이다. 남자가 여태 만나본 실력자는 대부분이 썩 선량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언제든지 케인을 쥘 준비를 하였다. 남자는 차분하게 경계태세를 취하며 마력의 근원과 마주했다. 어떤 자일까? 날이 선 긴장을 태연함으로 감싸야 할 때다.


 

그러나 남자의 예상과는 달리, 정작 마력의 주인공은 온화하게 웃으며 아이들에게 생선뼈를 발라주고 있었다.

 

 

 

 

 

 

 

 

 

 

 

 

 

 

 

 

=

타임라인은 팬텀이 아리아 만나기 전. 영웅즈는 자잘한 대 몬스터 게릴라 전만 진행하는 중.

 

 

이건 팬프팬이라 하기에도 민망하다. 프리드 어디...?

공강이라 너무 급하게 썼다ㅜㅜ으으 下를 언젠가 꼭 이어야 할텐데.

한달에 하나씩 딱 열개로 끝나는 단편모음이 쓰고 싶은데......이렇게 더뎌서야 2년은 잡아야 할 듯. 자체설정도 충만해서 여러 개.....정리해야 한다.................정 안되면 포기하고 그냥 내가 보고 싶은 장면만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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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迷

 

 

 

 

프리드는 저것과 비슷한 모양을 본 기억이 있다. 오직 품위만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문양들. 그 문양들이 곱게 새겨진 치맛자락은 들뜬 소녀의 나풀거림 따위는 모른다는 듯 점잔을 빼며 바닥을 스쳤다. 흰 장갑을 낀 오른손의 잔은 그이보다 나이가 많은 와인을 담았다. 얇은 깃털장식이 달린 부채 뒤로는 찬사가 있을지 비웃음이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프리드는 그들 틈에서, 떨어진 물건을 주워주는 것과 같이 가벼운 호의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호사스런 파티장은 목적지가 아닌 산만한 복도일 뿐이었다.

 

 

 

그저 벽인데도, 어지간히도 공을 들였다. 이 광경이 괴도의 취향이라. 은은히 빛나는 금빛 문양들이 수놓인 통로. 분명 보물 ‘창고’라고 명명했는데, 비교가 무색하지만 프리드의 침실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방보다 훨씬 그럴 듯 했다. 프리드가 고작 벽의 문양에 눈길을 준 것이 아까울 정도로, 시선을 잡아끄는 모든 것들이 주위에 가지런히 늘어져 있었다. 보석 세공품, 그림액자, 조각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기에 창고라는 이름이 무색하고 이름이 길디 긴 어느 미술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사전 속 ‘고품격’이라는 단어의 참고 사진으로 쓰이면 좋겠네. 프리드는 과거 귀족들의 치장을 잠시 떠올렸다가, 누구를 위하는 지도 모를 항변을 했다. 그래도 이것들은 오직 한사람만을 위한 호화가 아닌가. 공간의 주인만을 위한, 시각적인 사치. 외부인을 데려다가 그 시선의 행방을 좇는 소소한 즐거움. 멋스러움보다 실용성을 추구하는 편인 프리드는 아직까지도 그 감정에 대해 완전히 공감을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뭐, 소유자가 즐겁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여전히 한편에서는 쓸데없는 사치라고 중얼거리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남았지만.

 

 

 

화사한 통로는 현실과 동떨어진 꿈 속 나라 같아서, 프리드는 아름답지만 어지러운 문양들을 보며 전쟁에서 벗어난 생각을 했다. 맵시 있게 비틀어진 덩굴 문양에 가만히 손끝을 갖다 대며, 이것은 팬텀이 직접 고른 걸까 따위로 시작하는 하릴없이 평화롭고 개인적인 관심을 띄웠다. 물방울처럼 가볍게 맺히는 생각들은 온통 한사람을 향해 흘러내렸다. 덩굴모양을 따라 손가락을 가만가만 놀리는 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가랑비처럼 소리 없이 얕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역시 이런 거에는 관심이 없나 보네.”

 

 

연극배우처럼 굴곡 있는 목소리가 가볍게 벽을 타고 울렸다. 벽에 닿은 손가락이 순간 움찔거리며 빠르게 거둬진다. 팬텀은 그 손짓을 놓치지 않고 쳐다보았다. 가늘어진 눈매는 상대를 탐색하는 것 같기도, 그저 살풋 웃는 것 같기도 했다. 프리드는 상대의 카드를 몇 번 뒤집었다. 어느 쪽이 앞면일까.

 

 

“많이 기다렸어?”

 

 

평범한 대사였지만 그 향은 꼭 애인에게나 흘릴 법한 것이었다. 프리드는 그렇게 느끼면서도 머릿속에서 그 감상을 재빨리 꽁꽁 묶었다. 눈앞의 남자는 꼭 이렇게 한숨에 못 넘어갈 여지를 남겼다. 좋지 못한 버릇이라고. 프리드는 흔치 않게 가만히 도리질을 하곤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건넸다.

 

 

“결계석은 찾았어?”

“물론이죠, 대마법사님.”

 

 

손바닥만을 감싸는 장갑 덕분에 손가락은 흰 살결을 드러냈다. 괴도는 그 빛깔을 가볍게 눈으로 훑으며 평범하게 보이는 돌멩이를 얹었다. 팬텀은 눈짓으로 반대편 손을 가리키고, 그것을 알아낸 프리드가 순순히 두 손으로 받아들자 그제야 완전히 무게를 넘겼다. 결계석이란 돌멩이는 겉보기와는 달리 꽤나 묵직했기에 프리드는 목구멍에서 새어나올 법한 끙 소리를 삼켜야했다. 결계석은 흔하디흔한 반사광조차 없었는데, 프리드가 손을 통해 마력을 흘리자 그제야 모서리에서 희미하게 문자가 드러났다. 세밀하게 살피지 않아도 이러한 종류에서 최상품임이 한 눈에 보였다.

 

 

“와, 이거 꽤나 좋은 건데?”

“괴도의 창고에 평범한 게 있겠어?”

 

 

장난스럽게 피우는 거드름에도 프리드는 미소를 띠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찌되었건 마땅한 결계석을 얻을 방도가 없어 프리드는 며칠 간 말은 안했지만 골머리를 앓았다. 리프레 주변에 설치할 위장용 결계석이 필요했기에 커다랗게 마법어가 나타나는 평범한 결계석으로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밀고 당기는 나직한 대화 끝에 프리드의 고민을 우연히 꺼내버린 팬텀이 간단하게 해답을 내밀었다. ‘창고에 하나둘은 있을 걸?’ 평범한 결계석이라도 감지덕지할 거라고 생각했던 프리드는 이 능청스러운 괴도의 재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건 어떻게든 해결되었네. 묵직한 무게감에 벌써부터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팬텀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돌멩이를 들고 활기를 되찾은 프리드를 보고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세계 유일의 드래곤 마스터는 언제나 은은히 미소를 띠고 있기에, 개인적인 활기를 눈치채려면 유심하게 관찰해야 했다. 그가 기뻐하는 것 같아 괴도는 내심 뿌듯하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온갖 보석 속에 쌓여서 빛도 없는 돌멩이를 들고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마법사답다고 해야 할 지 프리드답다고 해야 할 지. 잿빛풍경이 익숙할 프리드에게 좀 더 어여쁜 걸 보여주고 싶어 동행했던 이유도 있었는데, 아마 무산된 것 같았다. 걱정을 크게 덜었다는 것도 뭐 만족스럽지만.

 

 

“정말, 아름다운 거에도 그만큼의 관심만 가져줬으면.”

“나라고 아예 관심 없진 않아.”

“들려? 네가 시선을 안 줘서 보석들이 슬퍼하는 소리가?”

“음, 네 목소리 밖에 안 들리는데.”

 

 

프리드는 무리 없이 웃다가 장난스러움이 스민 호칭을 덧붙였다. “괴도 씨.” 팬텀은 부러 골이 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을 배우마냥 능숙하게 까딱거리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눈매를 휘는 프리드가 나쁘지 않아서 이내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눈길을 맞췄다.

 

 

 

프리드는 그 눈길을 받아내며 나직하게 감상을 떠올렸다. 예기치 못하게, 고요하게. 발갛게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처럼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팬텀의 눈은 진실로 아름답다’는 짤막한 감상이 프리드의 사고를 세상에 없을 법한 색으로 물들였다. 어제도 한달 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팬텀의 자색 눈동자는 기이할 정도로 비현실적이여서, 마치 동화의 색 같았다. 세 가지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램프 속 요정처럼, 영혼을 바쳐 자신과 거래하자는 악마처럼, 이따금씩 프리드는 현실을 잊고 그에게 손을 뻗고 싶은 알 수 없는 충동을 견뎌야했다. 아름다운 것을 부르자면, 빛을 반사해야 반짝거리는 보석들이 아니라 바로 이 자를 불러야 한다고.

 

 

 

팬텀은 프리드가 열중하는 것이 자신의 두 눈이라는 걸 깨닫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였다. 둘을 둘러싼 분위기는,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라기보단 노을의 경계없는 빛깔처럼 진하게 물들어갔다. 하늘 위를 미끌어지는 구름처럼, 정적인 듯 하지만 눈치채지 못하게 금방금방 진행되어 가듯이. 시덥지 않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할까, 아무렇지 않다는 듯 행보를 옮겨야 할까 따위의 사소한 망설임은 눈조차 깜빡일 수 없는 공기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속삭임들이 가슴 속을 채웠다. 다시, 이 때야. 바로 지금. 팬텀은 차분하게 한마디를 뽑아내었다. 가장 근사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입술이 내키는 대로 본능적으로 낸 한마디.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야?”

 

 

소리를 억누른 심호흡을 하고, 다시, 겨우겨우 한 음절을, 자신의 숨이 알 수 없이 찬다는 걸 상대가 모르도록.

 

 

“프리드.”

 

 

 

 

 

 

 

 

 

 

 

 

 

 

 

 

 

 

 

 

 

 

====

그래

난 달달한 게 쓰고 싶었고 이게 최선이야.......

프리드는 팬텀에게 홀릴 것 같다. 그게 특기일 것 같아 팬텀.

제목은 그냥 뭐라 구분해야 할 것 같은데...조각글 2는 너무 못 찾을 것 같아서. 제목은 아직까진 거진 무의미하다. 그냥 순간순간들을 쓰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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