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迷
프리드는 저것과 비슷한 모양을 본 기억이 있다. 오직 품위만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문양들. 그 문양들이 곱게 새겨진 치맛자락은 들뜬 소녀의 나풀거림 따위는 모른다는 듯 점잔을 빼며 바닥을 스쳤다. 흰 장갑을 낀 오른손의 잔은 그이보다 나이가 많은 와인을 담았다. 얇은 깃털장식이 달린 부채 뒤로는 찬사가 있을지 비웃음이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프리드는 그들 틈에서, 떨어진 물건을 주워주는 것과 같이 가벼운 호의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호사스런 파티장은 목적지가 아닌 산만한 복도일 뿐이었다.
그저 벽인데도, 어지간히도 공을 들였다. 이 광경이 괴도의 취향이라. 은은히 빛나는 금빛 문양들이 수놓인 통로. 분명 보물 ‘창고’라고 명명했는데, 비교가 무색하지만 프리드의 침실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방보다 훨씬 그럴 듯 했다. 프리드가 고작 벽의 문양에 눈길을 준 것이 아까울 정도로, 시선을 잡아끄는 모든 것들이 주위에 가지런히 늘어져 있었다. 보석 세공품, 그림액자, 조각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기에 창고라는 이름이 무색하고 이름이 길디 긴 어느 미술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사전 속 ‘고품격’이라는 단어의 참고 사진으로 쓰이면 좋겠네. 프리드는 과거 귀족들의 치장을 잠시 떠올렸다가, 누구를 위하는 지도 모를 항변을 했다. 그래도 이것들은 오직 한사람만을 위한 호화가 아닌가. 공간의 주인만을 위한, 시각적인 사치. 외부인을 데려다가 그 시선의 행방을 좇는 소소한 즐거움. 멋스러움보다 실용성을 추구하는 편인 프리드는 아직까지도 그 감정에 대해 완전히 공감을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뭐, 소유자가 즐겁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여전히 한편에서는 쓸데없는 사치라고 중얼거리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남았지만.
화사한 통로는 현실과 동떨어진 꿈 속 나라 같아서, 프리드는 아름답지만 어지러운 문양들을 보며 전쟁에서 벗어난 생각을 했다. 맵시 있게 비틀어진 덩굴 문양에 가만히 손끝을 갖다 대며, 이것은 팬텀이 직접 고른 걸까 따위로 시작하는 하릴없이 평화롭고 개인적인 관심을 띄웠다. 물방울처럼 가볍게 맺히는 생각들은 온통 한사람을 향해 흘러내렸다. 덩굴모양을 따라 손가락을 가만가만 놀리는 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가랑비처럼 소리 없이 얕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역시 이런 거에는 관심이 없나 보네.”
연극배우처럼 굴곡 있는 목소리가 가볍게 벽을 타고 울렸다. 벽에 닿은 손가락이 순간 움찔거리며 빠르게 거둬진다. 팬텀은 그 손짓을 놓치지 않고 쳐다보았다. 가늘어진 눈매는 상대를 탐색하는 것 같기도, 그저 살풋 웃는 것 같기도 했다. 프리드는 상대의 카드를 몇 번 뒤집었다. 어느 쪽이 앞면일까.
“많이 기다렸어?”
평범한 대사였지만 그 향은 꼭 애인에게나 흘릴 법한 것이었다. 프리드는 그렇게 느끼면서도 머릿속에서 그 감상을 재빨리 꽁꽁 묶었다. 눈앞의 남자는 꼭 이렇게 한숨에 못 넘어갈 여지를 남겼다. 좋지 못한 버릇이라고. 프리드는 흔치 않게 가만히 도리질을 하곤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건넸다.
“결계석은 찾았어?”
“물론이죠, 대마법사님.”
손바닥만을 감싸는 장갑 덕분에 손가락은 흰 살결을 드러냈다. 괴도는 그 빛깔을 가볍게 눈으로 훑으며 평범하게 보이는 돌멩이를 얹었다. 팬텀은 눈짓으로 반대편 손을 가리키고, 그것을 알아낸 프리드가 순순히 두 손으로 받아들자 그제야 완전히 무게를 넘겼다. 결계석이란 돌멩이는 겉보기와는 달리 꽤나 묵직했기에 프리드는 목구멍에서 새어나올 법한 끙 소리를 삼켜야했다. 결계석은 흔하디흔한 반사광조차 없었는데, 프리드가 손을 통해 마력을 흘리자 그제야 모서리에서 희미하게 문자가 드러났다. 세밀하게 살피지 않아도 이러한 종류에서 최상품임이 한 눈에 보였다.
“와, 이거 꽤나 좋은 건데?”
“괴도의 창고에 평범한 게 있겠어?”
장난스럽게 피우는 거드름에도 프리드는 미소를 띠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찌되었건 마땅한 결계석을 얻을 방도가 없어 프리드는 며칠 간 말은 안했지만 골머리를 앓았다. 리프레 주변에 설치할 위장용 결계석이 필요했기에 커다랗게 마법어가 나타나는 평범한 결계석으로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밀고 당기는 나직한 대화 끝에 프리드의 고민을 우연히 꺼내버린 팬텀이 간단하게 해답을 내밀었다. ‘창고에 하나둘은 있을 걸?’ 평범한 결계석이라도 감지덕지할 거라고 생각했던 프리드는 이 능청스러운 괴도의 재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건 어떻게든 해결되었네. 묵직한 무게감에 벌써부터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팬텀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돌멩이를 들고 활기를 되찾은 프리드를 보고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세계 유일의 드래곤 마스터는 언제나 은은히 미소를 띠고 있기에, 개인적인 활기를 눈치채려면 유심하게 관찰해야 했다. 그가 기뻐하는 것 같아 괴도는 내심 뿌듯하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온갖 보석 속에 쌓여서 빛도 없는 돌멩이를 들고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마법사답다고 해야 할 지 프리드답다고 해야 할 지. 잿빛풍경이 익숙할 프리드에게 좀 더 어여쁜 걸 보여주고 싶어 동행했던 이유도 있었는데, 아마 무산된 것 같았다. 걱정을 크게 덜었다는 것도 뭐 만족스럽지만.
“정말, 아름다운 거에도 그만큼의 관심만 가져줬으면.”
“나라고 아예 관심 없진 않아.”
“들려? 네가 시선을 안 줘서 보석들이 슬퍼하는 소리가?”
“음, 네 목소리 밖에 안 들리는데.”
프리드는 무리 없이 웃다가 장난스러움이 스민 호칭을 덧붙였다. “괴도 씨.” 팬텀은 부러 골이 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을 배우마냥 능숙하게 까딱거리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눈매를 휘는 프리드가 나쁘지 않아서 이내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눈길을 맞췄다.
프리드는 그 눈길을 받아내며 나직하게 감상을 떠올렸다. 예기치 못하게, 고요하게. 발갛게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처럼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팬텀의 눈은 진실로 아름답다’는 짤막한 감상이 프리드의 사고를 세상에 없을 법한 색으로 물들였다. 어제도 한달 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팬텀의 자색 눈동자는 기이할 정도로 비현실적이여서, 마치 동화의 색 같았다. 세 가지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램프 속 요정처럼, 영혼을 바쳐 자신과 거래하자는 악마처럼, 이따금씩 프리드는 현실을 잊고 그에게 손을 뻗고 싶은 알 수 없는 충동을 견뎌야했다. 아름다운 것을 부르자면, 빛을 반사해야 반짝거리는 보석들이 아니라 바로 이 자를 불러야 한다고.
팬텀은 프리드가 열중하는 것이 자신의 두 눈이라는 걸 깨닫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였다. 둘을 둘러싼 분위기는,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라기보단 노을의 경계없는 빛깔처럼 진하게 물들어갔다. 하늘 위를 미끌어지는 구름처럼, 정적인 듯 하지만 눈치채지 못하게 금방금방 진행되어 가듯이. 시덥지 않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할까, 아무렇지 않다는 듯 행보를 옮겨야 할까 따위의 사소한 망설임은 눈조차 깜빡일 수 없는 공기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속삭임들이 가슴 속을 채웠다. 다시, 이 때야. 바로 지금. 팬텀은 차분하게 한마디를 뽑아내었다. 가장 근사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입술이 내키는 대로 본능적으로 낸 한마디.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야?”
소리를 억누른 심호흡을 하고, 다시, 겨우겨우 한 음절을, 자신의 숨이 알 수 없이 찬다는 걸 상대가 모르도록.
“프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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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달달한 게 쓰고 싶었고 이게 최선이야.......
프리드는 팬텀에게 홀릴 것 같다. 그게 특기일 것 같아 팬텀.
제목은 그냥 뭐라 구분해야 할 것 같은데...조각글 2는 너무 못 찾을 것 같아서. 제목은 아직까진 거진 무의미하다. 그냥 순간순간들을 쓰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