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를 사랑하지 않는 팬텀
팬텀은 결론을 내리는데 타인의 의견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정보원을 시켜 데이터를 수집하고 소거법을 통해 결론을 도출했다. 그게 다였다. 그는 며칠간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고 의식하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종종, 사실 자주 이 모든 게 부질없다고 느꼈다. 어떠한 그럴듯한 인과도 없는 푸념이었다.
사실 불면증과는 인연이 깊었다.
수백 년 동안 잠을 잔 부작용이라고 하기엔 팬텀은 까마득하게 오래전부터 불면증을 달고 살아왔다. 그게 흔한 시대였다. 편히 발 뻗고 잘 수 없고, 무언가에 비정상적일 정도로 목을 맨 사람들의 시대가 있었다. 오랜 암흑기 속에서 제정신인 사람은 드물었다. 삶이 있으면 희망도 있다고 믿는 작자들은 세상을 한 조각이라도 조우한 후에는 망연자실한 나머지 무기력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발버둥을 치지만 바닥은 끊임없이 깊어진다. 혹은 살얼음 위인 것을 외면하고 허구한 이상만 쌓는다. 숱한 지성인들을 두 가지 갈래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거칠고 단순해졌다. 헛된 희망을 말하는 동시에 불면증을 심하게 앓는 모순적인 사람은 팬텀이 아는 한 한 명뿐이었다.
그마저도 없어지려 했지만.
"어때?"
프리드는 물었다. 제출 전의 과제를 점검하듯이 괜찮다는 답변을 꼭 듣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준비물은 프리드의 '존재'인 버거운 과제였다. 말릴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까. 팬텀은 무표정으로 저울질을 했다.
"될 거 같기도."
"하하……다행이다."
흐린 미소가 진심이었다. 수확하는 농부마냥 뿌듯함과 안심이 들어찬다. 팬텀은 이 순간을 박제해 극에 올리면 시연당 30메소짜리 싸구려 공연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살은 따분한 소재였다. 그러나 누구의 죽음이냐가 중요했다. 언제나 유일성이 화제다. 팬텀은 여제를 떠올리곤 손가락이 곱아드는 걸 느꼈다. 사방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고 공포가 만연한데, 목숨을 바치는 영웅 이야기라. 퍽 잘 팔리겠네. 누군가가 희생해야만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 불합리한 분위기에 팬텀은 점점 질렸고 마침내 무료해졌다. 가장 소중한 걸 빼앗긴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문득 타오르는 분노를 삼키고 차분히 칼을 갈았다. 그리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무의미해진다. 아리아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이미 없는데 여기 왜 있는 거지? 똑같은 방식으로 자살하려는 대마법사를 매일 밤 지켜보는 일이나 하고? 아냐, 그래도 그 새끼들만은 죽여야 한다. 이딴 방식을 용납하며 말이야? 목소리는 언제나 광기가 반가운 듯 살갑게 속삭였다.
팬텀은 영웅을 자처한 후 늘 그렇듯이 혼란스러운 동시에 냉정함을 움켜쥐었다. 증오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한없이 연모하던 상대를 잃었으니, 이 애끓는 마음을 받아줄 상대가 간절했다. 영웅의 리더는 과연 이름값을 했다. 프리드는 상대를 선선히 자처하며 곁을 지켰다. 팬텀은 그 의도가 같잖으면서도 한편으론 사랑스러워 종종 어울려주곤 했다. 응석을 받아주는 것처럼. 네가 옳다. 너의 그 자기 파괴적인 전술은 효과적일 것이다. 반복된 답변이었건만 프리드는 만족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무신경한 면죄부보다는 걱정을 듣고 싶었는지도, 팬텀이 부디 붙잡아주길 원할지도 모른다. 원하는 답이 있으면서도 빙빙 둘러 말하는 한심하고 애처로운 인간처럼.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팬텀은 그를 사랑하지도, 가엽게 여기지도 않는데.
"왜 하필 나에게 묻지?"
"그거야."
잠시 자신도 모르겠다는 의문이 말간 얼굴을 스쳤다. 평소와는 달리 대마법사는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한 번도 되짚지 못한 물음인 것처럼, 깨닫지 말아야 할 금기를 입에 담은 것처럼. 푸른 눈동자에 감정이 얽혀들었다가 이내 스러진다. 폭풍이었다. 바닥까지 헤집어놓지만 어느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찰나, 순간, 그 누구에게도 쓸모 없어질 시간들. 그는 이윽고 입을 뗐다. 애쓴 흔적이 역력한 경쾌한 목소리다.
"너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테니까."
팬텀은 그 기대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했다.
"널 영영 잊지 못할 것 같아."
속이 빈 고백을 듣고 넘기듯이 프리드는 그저 웃었다.
"여기 오니까 알겠네."
메르세데스와의 관계는 간결하고 쉬웠다. 아주 먼 옛날부터 그는 팬텀이 별다른 꿍꿍이 없이 동료로 칭할 수 있는 자였다. 결전 전에도 팬텀은 결코 프리드를 가엽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메르세데스에겐 죄책감을 느꼈다. 저토록 아끼는 사람을 허망하게 잊게 될 운명이 딱했다. 그러니 지금, 수백 년 후 외딴 시간에 표류한 지금, 프리드의 부재를 별다른 항변도 집착도 없이 침착하게 받아들인 메르세데스의 모습은 팬텀에겐 큰 의외였다. 스스로 몹시 우스웠지만, 배신으로 느껴졌다. 이를 알면 메르는 길길이 날뛸 것이다. 나를 어찌 기만해. 입 닥치고 있었던 자식이? 대사도 뻔하고, 한 대 시원하게 맞을 것도 불 보듯 뻔했다. 팬텀은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좀 더 팬텀 멋대로 굴 수 있는 방향으로. 비겁한 도피처이자 배려 없는 독백 말이다. 그런 탓에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관계를 망칠 것을 알면서도 말을 이었다.
"프리드는 죽었구나."
짤막한 말이 어찌 이리도 낯설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팬텀은 도망치듯이 엘프의 숲을 떠나서도 계속 되뇌었다. 정말 없구나. 없다는 걸 알겠다. 징그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다가온다. 왜? 결론이 없는 생각을 이어나가니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짓을 말한 죗값이야. 이런 망상을 하면 조금은 눈을 붙일 수 있었다. 한없이 그리워한 이의 꿈을 꾸었다. 애정을 달게 삼켜야 벗어날 수 있는 악몽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정겹게 속삭임이 따라붙었다. 후회하지. 애원하고 싶잖아. 혀를 뽑고 심장을 토하고 싶을 정도로 말을 주워 담고 다른 걸 뱉고 싶잖아. 다른,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이기적인 말들을. 너를 원망하지?
비통한 환청에 팬텀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리하면 다시금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의 꿈을 꿀 것 같았다. 영원히.
뎀님이 답글을 써주셨습니다. 꼭 읽어주세요 여러분...본문은 안 읽어도 아래 링크는 꼭 읽어주시기에요.
팬텀프리 죽음의 기하학
https://merrygoaround.postype.com/post/975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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