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나무 밀회에서 이어집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가 가루로 부서졌다. 썩은 지 몹시 오래되었을 터였다. 나무에 달린 가지들조차 손을 대면 바스러져 흩날릴 것 같다. 밤이 집어삼킨 숲은 나무의 공동묘지다. 이미 장례를 올린 지 오래된 나무들의 숲속, 죽음은 나뭇잎 사이사이에서 느릿느릿하게 연주되었다. 어리석은 관객에게 어서 물러나라는 듯, 숨 가쁘게 달려 네 숨을 지키라는 듯 음울하게 안개를 뿜어내었다. 악몽에서 만났던 유령이 희미하게 속살거렸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코를 박은 흙에선 네 무덤 냄새가 날 거야.
그러나 맹랑한 저학년은 뻔뻔하게도 걸음을 되돌리지도, 공포 속에 몸을 벌벌 떨지도 않았다. 땅을 구르는 발걸음이 곧 휘파람까지 불 경쾌한 기세다. 달빛은 언제나 그를 가호했다. 운을 끌고 다니는 이 특유의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기세가 그의 그림자에 짙게 배어있다. 금발 머리 소년은 연인의 정원을 몰래 방문한 것처럼 조용하고 빠르게 숲을 활보했다. 팬텀이 금지된 숲을 쏘다니는 데에는 여러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암, 그렇고말고. 첫째, 호그와트의 가장 엄중한 벌칙이 금지된 숲 순찰이니, 곧 세기의 괴도가 될 그가 미리 알아두면 좋다. 벌을 먼저 겪으면 도망쳐야 할 것은 전혀 남지 않는다. 애초에 쏘다니다 걸려도 벌칙으로 다시 여기에 오게 될 것 아닌가. 기숙사 사감이 자비를 베풀어 냄새나는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될 수도 있지만, 뭐. 둘째, 그는 아지트 후보를 물색하고 있다. 기왕이면 천장이 있는 곳이 좋겠지만, 금지된 숲의 숨겨진 아지트는 몹시 근사한 어구였다. 괴도 팬텀 님의 창고라면 역시 이런 곳엔 하나쯤은 있어야 체면이 살지 않겠어.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셋째. 교장은 굳이 금지된 숲을 언급하며 가지 말라고 말했다. 그 말은 곧 이곳이 가장 학생들이 발을 들이지 않을 장소라는 것이다. 동시에, 온갖 꿍꿍이 있는 자들은 여기로 모이겠지. 그는 재미없게 팔딱이는 피라미를 위한 낚싯대를 드리울 생각이 없었다. 마음을 먹었으면 고래를 잡아야지. 금지된 숲에 숨어들 정도로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비밀 같은 거 말이다.
오늘은 금성이 뒷걸음질 치는 날이니 켄타우로스 무리는 동굴에서 뼛조각으로 점을 볼 것이다. 또 보름달이 되기 사흘 전이니 아직 마법 생물들이 정신나간 듯이 날뛸 시기도 아니었다. 즉 호그와트 학생이 금지된 숲에 오기 안성맞춤인 시기였다. 팬텀은 자신 말고 또 다른 학생이 이 시기를 알고 숲에 숨어들까, 가능성이 희박한 호기심이 들었다. 학생이든, 불청객이든 누구든 좋으니 존재만 하면 되니까. 그는 기쁘게 질문을 물 것이다. 팬텀을 움직이는 건 늘 질문이었다. 저 월광석을 몰래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만드라고라를 써먹을 수 있을까, 액자를 만들어 초상화의 인물만 옮길 수 있을까, 혹여 자신보다 간 큰 녀석이 있을까. 더한 비밀이 있을까. 그리고 물음은 그가 가질 수 있는지로 이어졌다. 아무런 의무가 없기에, 그 자체로 세련된 욕망으로. 손가락 끄트머리가 조급한 기대로 움츠러든다.
달이 뜨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호수가 나왔다. 이곳에서 종종 유니콘이 목을 축인다는 헛헛한 소문이 돌았다. 나무 사이로 달빛이 반짝거리고, 바람이 발돋움을 한 채 제자리를 맴돌았다. 팬텀은 회청색 나뭇잎 틈으로 호숫가를 살폈다. 조용히, 사냥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숨을 죽인다.
자색 시선은 손쉽게 작은 인영을 포획했다. 푸르게 빛나는 호숫가엔 유니콘은 없지만, 사람이 있었다. 팬텀은 환호성을 우아하게 집어삼켰다. 멀리 떨어진 밀빛 머리칼이 어둠에 젖어 있었다. 그 사람은 어슴푸레한 물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참 동안 호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허연 손바닥이 무언가를 가방에서 꺼내었다.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자박자박 검푸른 물로 기어들어간다. 몰래 숨어든 불청객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시간을 가늠하려는 듯 하늘을 보았다. 가리지 않은 얼굴이 달빛 아래 환하게 드러났다. 부드러운 굴곡. 자신 말고는 이곳에 올 수 없다는 오만한 평온이 감도는 눈동자. 어떤 사실 하나를 알아챈 심장이 두근거리며 요동쳤다. 아는 얼굴이다.
프리드.
팬텀은 눈을 반짝였다. 프리드가 호숫가에 비밀을 풀어두고 있었다. 모범생, 마법 천재, 차기 전교 회장, 가차 없는 평화주의자. 그는 금방이라도 자신이 잡은 고래와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1학년 때부터 프리드는 심심치 않게 회자되었다. 모든 과목의 시험이나 과제에서 만점을 마법 천재에 머글 태생이니 그럴 만도 했다. 수상쩍은 점은 머글 태생치곤 마법 사회에 익숙하게 군다는 것이었는데, 그걸 이상히 여기는 아이는 팬텀 뿐이었다. 다들 그냥저냥 선행을 열심히 했겠지, 라며 받아들였다. 팬텀은 따분한 얼굴로 책상 위에 발목을 꼬아 올렸다. 멀리서 혼자만 마법의 역사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프리드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 굳은살은 머글펜을 잡아 생긴 것이 아니다. 깃펜을 수년간 잡아 생긴 것이지. 건방진 자세로 눈을 감았다. 졸음은 오지 않고 하나의 광경이 떠올랐다. 왁자지껄한 대연회장. 호박파이 냄새, 날아다니는 부엉이, 편지가 떨어지는 소리와 웅성거림. 그 속에서 말갛게 웃는 낯짝. 팬텀은 눈을 뜨곤 다시 성실한 뒷모습을 응시했다. 또, 어떤 머글 태생이 손을 쓰지 않고 스테이크를 마법으로 능숙하게 자른단 말인가? 프리드의 모든 사소한 습관은 꼭 지팡이를 쥐고 태어난 것 같았다. 그는 마법에게 축복받으며 태어났다. 분명해. 마법사에게 길러진 이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다.
집요한 시선을 알아챈 프리드가 그를 돌아보았다. 팬텀은 찡긋거리며 장난스레 윙크하곤, 나머지 눈도 감아버렸다. 프리드의 시선이 머무는 게 느껴졌으나 뻔뻔스레 고른 숨을 내쉬었다.
언제 한 번 캐볼까.
그와 프리드의 관계는 수년 동안이나 별 게 없었다. 기숙사가 달라 유별난 접점이 없기도 했고, 천재 꼬마마법사께선 넌지시 물어도 순진하지만은 않은지 요령 좋게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굳이 한계까지 몰아붙이지 않은 이유는 유난히 드문 맛의 사탕을 아껴놓는 것과 같았다. 물론 팬텀의 갖가지 만행들을 프리드가 캐물을 때도 비슷했다. 이번 아모텐시아 말이야. 달맞이꽃 기름을 쓴 게 인상 깊었어. 프리드가 단정하게 말하면, 팬텀은 황송한 척을 일부러 숨기지 않곤 말했다. 내가 아니라 그 대단한 범인이 들으면 기뻐했을 텐데. 요컨대, 둘은 표면만 핥는 관계였다. 최근까지는. 학년이 올라와 아리아가 프리드와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지자, 두어 번 과제를 하고 세네 번 식사를 한 게 다였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이 그에게도, 프리드에게도 이례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중 한 사람은 뻔뻔하기 그지없게도 아무런 말이나 하고 있었다.
"드래곤은 거대 오징어도 잡아먹는대.”
드래곤이란 단어에 푸른 눈동자가 깜빡였다. 유별난 반응 없이 차분하다. 팬텀은 흘깃 표정을 살피며 상대를 확실히 못 박았다.
"재밌는 사실이지? 프리드.”
"호수 바로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네, 팬텀."
다정한 목소리로 호수 속 거대 오징어를 배려하라는 듯 일렀다. 시간이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오후였다. 햇살이 반짝이는 호수 속에 거대 오징어의 커다란 그림자가 평화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재잘거리는 소란과 드문드문 환호가 이어진다. 멀리서 퀴디치 연습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그리핀도르와 후플푸프인가. 슬리데린의 자랑인 수색꾼이 눈앞에 있으니 필히 그럴 것이다. 수많은 눈길을 몰고 다니는 슬리데린 블론디가 떠날 기색이 없자, 프리드는 조용히 책을 덮고 내려놓았다. 그를 어찌 생각하든 간에, 팬텀은 주변에 그저 세워둘 수 있는 인물이 못되었다. 눈을 떼지 말라는 듯 반짝거리는 그가 지목하면, 상대는 재깍재깍 무대로 끌려 나와 손을 마주 잡아야 했다. 프리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며 마디의 중간중간을 깔끔하게 매듭지었다. 흥미롭지만 곤란한 타입이다. 적어도 대화의 박자라도 제가 쥐고 싶었다.
팬텀이 루미너스와 잔디밭에서 책을 펴고 있던 프리드에게 다가가 말을 건 지 이제 10분이다. 루미너스는 예고 없이 찾아온 그를 대놓고 성가셔했다. 아즈카반의 존립 이유에 대한 토론이 어지간히도 중요했나 봐. 듣기만 해도 지루한데. 팬텀은 옆에서 쏘아지는 짜증 어린 눈길을 외면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애완 드래곤이 헤엄이라도 치고 싶어 하면, 저 호수에는 풀어놓을 수 없겠지. 생물이 워낙 많이 사니까 말이야. 사실 내가 좋은 호수를 알고 있어. 드래곤의 비늘만 버틸 수 있는 산이 강한 물..."
말이 뚝 끊긴다.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가 얄밉게 호선을 그리고, 이윽고 빙그레 웃음이 걸린다. 제 눈앞의 프리드는 걸작이었다. 얼굴은 여전히 상냥하지만, 시선이 어찌나 시퍼렇게 따가운지 소름이 짜릿하게 올라왔다. 빙고. 팬텀은 살포시 눈웃음을 치고는, 허리를 숙여 앉아있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나랑 산책할래, 프리드?"
거절할 수가 없겠지. 제의받지 않아도 어디론가 팬텀을 끌고 갈 얼굴이다. 자신을 해부하고 다시 조립하는 그 눈을 보자니, 팬텀은 속삭여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억울해하지 마. 날 거절한 사람은 한 명도 없거든.
"좋아. 용건이 뭐야?”
팬텀은 대답하지 않은 채 프리드의 손을 살포시 쥐어 올렸다. 그리곤 모른 척 꾹꾹 눌렀다. 멀쩡해 보이지만 드래곤에게 입은 상처는 내상이 크지. 화상까지 입으니까 아무리 마법 천재라도 즉각적으로 치료할 수는 없을 거다. 프리드는 그가 하는 양을 빤히 보며 손을 맡기고 있었다. 음, 잘 참네. 드래곤이 아니었나? 손을 맡긴 이는 어리둥절한 것 같기도, 그저 미심쩍은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그의 의중을 진작에 파악한 채 가소롭다는 듯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던가. 순순히 약간 체온이 낮은 손을 놓아준다. 흐응.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상대를 들여다본다. 세 번째겠군.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미남과의 영양가 없는 대화를 이렇게 넘겨도 후회 안 하겠어?"
프리드는 짤막하게 웃곤 물 흐르듯 답했다. 황당한 비웃음이었다. 예상외의 습격에도 태연하게 반격할 때의 눈썹 모양, 친절한 입매, 순한 눈매와 대조를 이루는 눈빛. 어쩐지 그 얼굴이 좋아서, 팬텀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샐러드보단 메인 디쉬에 집중하자는 주의라서."
"메인 디쉬라."
그렇지, 내 사냥감. 어젯밤 신경을 기울여 세공한 단어를 떠올린다. 흐붓한 달빛을 회상하다가, 돌연코 프리드의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 앙 깨무는 흉내를 내었다. 순간이지만 손가락이 긴장 속에 딱딱하게 굳었다. 진득하게 눈을 맞추니 뼈까지 발라 먹는 듯 기이하고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 말이 이토록 배부를 줄은 몰랐다.
"네 비밀을 알아."
저학년 동안 팬텀이 그의 과거를 은근히 캐물었을 때와는 달리, 시치미를 뗀다든가 겉치레는 아무 의미 없었다. 그 사실을 프리드는 몹시 잘 알았다. 그는 얼굴을 가리면 숨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물에 걸렸으면 숨지 말고 끊을 궁리를 해야 한다. 이 거창한 사냥꾼을 어찌 따돌릴 수 있을까, 머리가 팽팽 돌았다. 프리드는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간단하게 대꾸했다.
"새벽 세 시에 만나자."
급소를 파악할 시간은 주지도 않고, 한 번 더.
"문제없지, 팬텀?"
모나지 않은 눈매가 순간 샐쭉 좁아 들었다. 프리드는 오래도록 미룬 데이트를 말하듯 익숙하고 아무렇지도 않다. 그리곤 멋대로 타박거리며 훌쩍 사라진다. 손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까만 교복 망토가 마른 발목께에 팔락거렸다. 박자를 놓친 팬텀은 헛웃음을 뱉었다. 구석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남겨지는데 익숙지 않아 알쏭달쏭하고, 조금 분한 마음이 났다. 거친 날씨에 적응한 빳빳한 잔디는 온 정경을 뒤덮었다. 싱그러운 청하를 배경으로 까만 점은 멀어져 가다가, 곧장 탑으로 쏙 들어간다. 팬텀은 그 모습을 고스란히 바라보며 느릿하게 곱씹었다. 비밀을 저당 잡힌 이와 새벽 세시의 밀회라, 떠올리는 것만으로 풍미가 있는 일정이다. 그러나, 대체 어디서?
쫓아가 다시 묻고 싶진 않았다. 자존심이 센 소년은 뚱하게 궁리했다. 프리드는 그리핀도르라 기숙사에선 절대 만날 수 없다. 새벽 세시. 필치의 순찰이 잦아들지만, 그렇다고 맘대로 나다닐 수는 없는 시간대. 노리스 부인이 쥐를 잡아먹는 새벽. 꼼꼼하게 경우의 수를 고른다. 그리핀도르 초상화 앞? 혹은 가까운 계단인가. 그와 유난히 자주 마주쳤던 도서관 금지구역 앞일 수도 있다. 프리드가 그리 무모한 성격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부엉이 탑은 확실히 급한 연락을 보내려 했다는 구실이 생기지만 둘의 기숙사와 모두 지나치게 멀었다. 대화의 맥락을 단순히 파악하면 아마 여기 호숫가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띄는 곳에서 굳이 새벽에 만날 필요는 없었다. 왜 하필 새벽 세시일까? 방과 후 어느 시간이라도, 둘은 손쉽게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프리드. 모범생, 마법 천재, 차기 전교 회장, 가차 없는 평화주의자. 꼬맹이 때부터 성인군자 소리를 듣고 다니지만, 저학년 머글 학생에게 향한 모욕은 참지 않는 이상한 박애주의자. 바닥을 치는 체력 덕에 쉽게 널브러지면 제 두 다리를 질질 끌며 병동까지 거의 기다시피 혼자 갔다. 고작 열두해를 살았으면서 기대는 법은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았다. 미련하긴. 프리드. 꾀병을 부리곤 병동에서 지도를 살피다가 눈에 들어온 재미 없는 동급생. 팬텀은 기어코 그가 병동에 다다르고 나서야 집요정을 불렀다. 바들거리는 마른 어깨를 보곤 왜인지 다음엔 그냥 부축해줘야 겠다는 다짐을 덜컥 세웠다. 그러나 프리드는 아픈 것을 더 능숙하게 숨기게 되었다. 늘 그런식으로 눈에 밟히는 애매한 거리가 있었다.
너랑 말이 잘 통할거야. 아리아가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주제. 그녀가 이야기하는 프리드는 악착같이 혼자 병동을 찾아온 고집쟁이가 아닌, 친절하고 상냥한 마쉬멜로우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프리드의 칭찬을 늘어놓는 아리아에게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렇게 착해 빠진 것처럼 안 보였는데.
팬텀은 이윽고 가장 유력한 후보를 떠올렸다.
모두가 잠든 밤, 촛불이 어설프게 기지개를 켜곤 다시 사그라들었다. 종이에 노란빛이 스며드는 게 좋다. 머글의 형광등으론 느낄 수 없는 정취에 그는 꽤 애정을 가졌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글자가 더디게 눈에 들어온다. 역시 아란 말대로 체력을 키워야 하나. 빗자루를 두 개나 들고 개인 훈련을 시켜주겠다는 친우를 떠올리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사납기로 유명한 몰이꾼은 호시탐탐 프리드의 체력 쌓기라는 목표를 노렸다. 과격한 운동을 할 생각에 조금 더 피곤해졌지만, 이렇게 매일 밤 책을 덜 읽고 자러 가는 게 마음에 걸린다. 아직 읽을 책이 많은데……. 아쉬움이 허리띠를 잡고 안락의자에서 놔주지 않는 것만 같다. 프리드는 작게나마 하품을 하며 가물가물한 눈을 다부 떴다. 새벽 세시다. 오늘은 이만 가서 자야지 내일 밤 그 애에게 갈 수 있다.
프리드는 느릿느릿 나선 계단을 오르곤 조심스럽게 기숙사 방문을 열었다. 룸메이트가 코 고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다른 룸메이트를 위해 가볍게 침묵 마법을 걸어주고, 살금살금 자신의 침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자야지, 하곤 하얀 커튼을 걷었을 때는,
"안녕?"
페트리피쿠스 토탈루스!
무언 마법이 나간 건 순식간이었다.
"너무한 걸, 프리드."
불청객은 프리드의 베개를 받침대 삼아 삐딱하게 턱을 괸 채 그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달빛에 머리칼이 어우러져 어둠으로 풀어진다. 밀회를 기다렸던 연인인 마냥 자연스럽게 눈꺼풀을 내리깔고 투덜거린다.
"새벽 세 시에 만나기로 해놓고. 잊은 거야?"
"음……."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천연덕스럽게 눈꼬리를 추욱 내리는 모양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래, 프리드는 사실 팬텀의 도발을 상대할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일부러 까다로운 새벽 세 시를 택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콧대 높은 귀족 도련님인 만큼 장소를 되묻진 않을 테고, 매일 밤 학교를 헤매며 고생하거나 흥미가 식어 서서히 잊을 거로 생각했는데. 침대 위의 팬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삐딱하게 웃으며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상대를 얕본 건 큰 실수였다. 프리드는 난처하고 귀찮은 기색을 꾹꾹 눌러담았다. 지은 죄가 있으니.
그는 민첩하기로 유명한 수색꾼 답게 반사신경이 끝내주게 좋았다. 간발의 차로 급소 바로 옆에 꽂힌 주문을 보고 놀라 동그래진 눈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다급한 질문에 대답도 않은 채, 수 초 만에 여유를 찾곤 "무언 마법도 할 줄 알아?"라고 뻔뻔하게 속삭여왔지만 말이다.
"호그와트에서 내가 못 가는 곳은 없어."
"이거, 범죄 고백이지."
"낭만 없긴."
커다란 허풍까지 내뱉으며 침대를 토닥이는 꼴이 밉지 않았다. 붉은 사자가 수놓인 휘장 사이에서, 팬텀은 슬리데린의 은녹색 넥타이까지 뻔뻔하게 목에 걸고 있었다. 프리드는 잠시 스스로의 경솔한 언행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핀도르 룸메이트와 자신의 사생활은 어디로 가는가? 대체 어떻게 암호를 뚫고 왔는지 머리가 팽팽 돌았다. 못 들일 사람을 끌어들인 탓에 죄책감에 등골이 찌릿하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모든 것의 원인인 팬텀은 어느새 허리를 세워 코앞까지 다가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더 내칠 곳이 남아있어? 고요한 표정은 곧 촛불을 불어 끌 기세다.
"난 여기도 마음에 들어."
독촉이 나긋나긋하다. 프리드는 촛불을 당겨 피했다. 묵직한 시선으로 조용히 내려보다가, 먼저 뒤돌아서며 나직하게 말한다. 보이지 않아도 그 매끈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걸 알 수 있었다.
"망토 입어."
친히 권하는 산책의 시작이다. 부디 저 자식이 그 애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저 낯짝 두꺼운 괴도를 뒤에 달고 브레스까지 피하기엔 밤이 너무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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