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예고편을 보고 쓴 글입니다. 소재만 따왔기 때문에 영화와 상이한 설정이 많습니다.
사망 소재가 옅게 있으며 취향을 탈 수 있습니다. 읽으면 기분이 흐려질 것 같아요.
이와이즈미 하지메 구하기
날이 더워지면 아무리 엄격한 체육부라도 흐트러지기 마련이었다. 체육관 입구에 우수수 나뒹구는 운동화를 굳이 나무라는 한가한 사람은 없었다. 막 걸음마를 뗀 여름은 후덥지근한 남고생의 신발 속에 있는 듯 묘하게 꿉꿉하고 더웠다. 차라리 그편이 쉬웠을 터라고 쿠니미 아키라는 심심하게 떠올렸다. 철없는 소년이 신고 노다니는 것 마냥 세상은 제멋대로 뒤집혀 있었다. 한구석에서는 곡소리가 나고, 다른 곳에서는 무책임하게 자기 몸을 내던지는 일상.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헤아리기도 무료해져서, 아키라는 꼬인 감상을 놓아주고는 뻑뻑한 수도꼭지를 돌렸다.
쇳소리가 삐걱거리다가 이내 물줄기가 터져 나왔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평소라면 질색하며 피했을 텐데, 날이 더워 그마저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멀리서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찍어내는 소리, 바람이 교사 창문을 타며 유리 긁는 소리가 났다. 여름의 소리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마음 가는 데로 행보를 정했다. 타박대며 아키라의 쪽으로 걸어오는 발걸음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에 푹 젖어서 답지 않게 질질 끌리는 걸음걸이가 아키라의 여름을 비집고 왔다.
아키라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름도 분명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와이즈미 씨."
분명 걸어왔을텐데도 단단한 가슴팍이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있었다. 눈매가 오밀조밀 일그러지는 모양을 보곤 대답이 쉬이 짐작이 갔다. 그러나 아키라는 대사를 미루는 게으른 단역처럼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다. 이와이즈미는 입을 열어 성실히도 고해성사를 뱉었다.
"믿더라."
목소리가 칼칼하다. 그럼, 안 먹힐 줄 아셨나요. 그렇게 철저하게 대비했으면서. 입술 틈으로 툭 불거져 나온 모난 소리를 잘게 씹었다. 심드렁하게 쏘아붙이고 싶어도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보면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자긴 그리도 다부지게 굴면서.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딱딱한 철판을 아무리 주먹으로 때려봤자 자기만 아픈 것처럼. 아키라는 눈꺼풀을 깜빡였다. 아직도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여름을 메우고 있었다. 손을 뻗으니 물줄기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뚝 멎었다. 정작 한 모금 목을 축이지도 못했다.
한 달 전인가 문자가 왔다. 구체적인 날짜는 아무도 입에 담지 않았지만, 그 날을 모르는 사람은 전 지구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아키라는 휴대전화의 플라스틱 플립을 딸깍거리며 여닫았다. 허옇게 빛나다가 점멸하기를 반복하는 화면에는 아주 간단한 문자들만이 나열되어 있었다.
'당신의 수명은 40일 23시간 35분 2초 남았습니다'
아무런 논리도, 맥락도 없는 것이 딱 신의 메시지다웠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예고’는 장난 문자와 같이 날아들었다. 전 지구적 장난이 아닐까, 흥미 위주의 주말 오전 프로그램에 실리던 ‘예고’는 시간에 딱딱 맞춰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절대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정보가 스스로가 죽는 날이라는 사실에 인류는 깜짝 놀라버렸다. 악질적인 상상과 현실이 뒤바뀌니 세상이 난장판이 된 것도 놀랍지 않다.
장례식 예약 산업과 죽음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생겨났고, 하루에도 수천 명이 재미 삼아 뛰어내리며 자살 기도를 했다. 완벽한 여생에 대해 미디어가 끊임없이 떠들고, 수많은 가설과 괴담이 쏟아져나왔다. 수명을 늘리는 데 전 재산을 건 백만장자. 비행기에서 뛰어내려도 수명이 남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 연인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곁을 지키다가, 수명이 남아서 죽음은 피했지만 전신마비에 걸린 로맨티스트. 아, 마지막은 좀.
"곁을 지키다가 사고에 휘말리다니……. 죽음이 아니더라도 불행은 수도 없이 많으니 당연한 이야기죠. ‘예고’는 죽음만을 알려주지, 다른 사고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니 말입니다."
"정부는 ‘예고’된 사람의 격리 조치를 권고했습니다. 한편, 운명주의 단체들은 그 권고가 전혀 소용이 없을 거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인류는 이제 가장 외롭게 죽어 나가게 되었군요. 이것이야말로 재앙이 아닐 수 없습,"
전파가 섞인 목소리가 순간 뚝 멎었다. 아키라는 청각을 찢는 정적에 생각의 우물에서 고개를 퍼뜩 들었다. 삐죽삐죽한 뒤통수가 부실에 놓인 라디오 옆에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방금 끈 것이다. 성실한 선배는 요즘 줄곧 혼자가 되려는 아키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오늘은 연습게임이 잡혀있어서 끽해야 킨다이치나 나돌아다닐 줄 알았는데. 아키라는 부러 곤란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후배의 행색을 하며 차분하게 변명을 골랐다.
"저, 연습에는 곧 가려고 했어요.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
"…이와이즈미 씨?"
쿠니미를 찾으러 온 것이 분명한데, 이와이즈미는 정작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까무잡잡한 손 마디가 낡아빠진 라디오 버튼에서 툭 떨어져나왔다. 그 추락이 어찌나 안쓰러운지 제 심장도 함께 투신할 것 같았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상책인데. 그래야 귀찮아지지 않는데……. 아키라는 말의 고삐를 단단히 동여매었지만 쿵쾅거리는 심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찰나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 난잡하게 뇌를 움켜잡았다. 맞아, 선배도. 선배도 얼마 안 남았지. 이제 곧 여름이지. 그럼에도 이와이즈미의 얼굴은 얼른 납득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아무리 짤막한 시간만을 함께 했다곤 하지만,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러 지울 수만 있다면 당장 튀어나갔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아키라는 넋이 나간 채로 광경을 받아들이기에 바빴다.
이와이즈미 씨, 뭐하는 거예요. 왜 그리 겁먹은 표정을 지어요.
“쿠니미, 고맙다."
감사인사가 텁텁했다. 듣고 있기만 하는데도 목구멍이 까끌까끌해서, 아까 물 좀 마실 걸 그랬다. 이와이즈미는 굳이 너 덕분이라는 둥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아키라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을 들었다면 정말 참지 못하고 제멋대로 굴어버릴 것 같았다.
꼭 애완동물을 구출한 것 같네요. 꼬마네 집 문을 열어서 강아지라도 탈출시킨 것 같아요. 손을 뻗어 그리 흐트러지지 않은 넥타이를 일부러 풀고는 다시 단정하게 매어주었다. 평소보다 더 건방지게 스킨쉽을 해와도 이와이즈미는 무슨 생각인지 별말을 하지 않았다. 붉은색 넥타이를 쓰다듬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아니, 강아지라고 한다면……훔친 거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네요. 목줄을 쥐고 있으면서 ‘탈출’ 운운할 정도로 되바라지진 않았다.
주장은 답지 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다. 한 톨 만한 순진함이 죄다 둘도 없는 파트너에게로 향했으니 다행이었다. 이와이즈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소름 돋는 눈칫밥으로 진작 알아차렸을 것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올곧은 신뢰는 보는 이로 하여금 때아닌 감상에 젖게 했다. 아니면, 오이카와가 모른 척 눈감아주는 걸 이와이즈미가 알아채지 못했거나. 실은 이와이즈미를 역으로 안심시키곤 뒤에서 작당을 꾸미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키라는 한숨을 뱉어내고 의심을 탑처럼 쌓아 올리는 것을 멈췄다. 이런 식으로 따지기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관계는 퍽 끔찍한 구석이 있었다. 너무 깊고 깊어서 제 3자는 커녕 당사자들도 굴러떨어지는 관계인데, 우연히 끼어든 아키라가 나서서 어쩌랴 싶다. 운이 나쁜 오이카와가 딱해서 슬플 지경이었다.
이와이즈미의 문자를 본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휴대전화를 새로 바꿔서 서툴다는 선배의 단축번호를 정리해주려는 호의였을 뿐이다. 때마침 문자가 온 것은 말 그대로 신의 놀음이었다. 그때만 해도 장난 문자겠거니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와이즈미도 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았다. 막 개통을 해서 쏟아지는 통신사의 통보 문자에 단순히 발견 자체를 못했나 싶기도 했다. '예고'가 확실하다는 것이 세간에 퍼지자 다른 고민으로 골머리를 앓느라, 어여쁜 후배가 수명을 훔쳐봤는지 따위의 사소한 사실은 뒤로 미루었을지도 모른다.
아키라는 그 다른 고민을 해결해주는데 선선히 공범을 자처했다. 고민은 뻔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속이기. 문자 위조까지 감쪽같이 마쳤다. 삼십이 년 후 오이카와의 생일로 날짜를 위조해서, 여태 수명을 알리지 못한 그럴듯한 이유도 만들어냈다. 이 못 되먹은 아이디어를 아키라가 설명하자 이와이즈미는 ‘잘했어.’ 라고 말했다. 침착한 어조였지만 목소리가 자그맣게 떨리고 있었다. 오이카와, 미안. 네 생일에 죽는다고 말하기가 좀 그랬어. 이와이즈미는 평생 몇번 하지 않은 거짓말을 능숙하게 해낼 것이다. 그만큼 오이카와에게 간절하니까.
진실로 오이카와가 그 조잡한 트릭에 속아 넘어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를 지극히 신뢰하고 사랑하고, 그래서 이와이즈미가 바로 다음 주에 죽는다는 생각은 꿈도 못 꿀 거라는 어설픈 추측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와이즈미가 속이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는 것이다. 생의 마지막 따위, 아무것도 모르는 오이카와의 손에서 빼앗아서…….
아키라는 저벅저벅 이와이즈미의 뒤를 따랐다. 짤막한 거리를 걸으면, 이와이즈미는 와르르 쏟아진 신발을 보고 호통을 칠지 조금 고민할 것이다. 어찌해도 다정한 사람이라 투박한 손으로 능숙하게 정리하겠지. 곧 죽을 사람답지 않게, 남은 날이 창창한 팀 멤버들을 격려하고, 이끌어주고, 받쳐주는 이와이즈미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키라는 아마 함께 냄새나는 운동화들을 정리하고, 그 시원시원한 목소리에 맞춰 경기를 뛰고 공을 줍는 둥 이와이즈미를 도울 터였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비품실에 이와이즈미를 끌고 들어가서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선배, 망상이에요. 죽을 때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해도, 오이카와 씨가 전신마비 같은 거 걸릴 리 없잖아요. 선배는 지금 아주 이기적으로 굴고 있어요.
두 달 전이었으면 정말 그랬을 지도, 상상이 참으로 헛되다. 애석하게도 아키라 역시 남은 삶이 몇 모금도 남지 않았다. 곧 죽는다.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이 상황에서 아키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위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이와이즈미가 괴상한 게 분명했다. 죽음이 지척인 사람은 제 욕심을 당연히 내세울 수밖에 없다. 아키라는 그리 뇌까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징그러운 시간은 폐를 스치며 흐르고 있었다.
"선배는 언제에요?"
"얼씨구. 너도 걱정되냐? 걱정마, 쿠니미. 나는 살 만큼 살다가,"
"저는 6월 10일이에요."
"…….”
"그 날, 선배 생일이죠?"
"……어.”
"……."
"나도야."
"……그렇군요."
"하, 너 정말……."
"죄송해요."
"……."
"……."
"쿠니미. 그 날, 만날래?"
생의 마지막 따위, 아무것도 모르는 오이카와의 손에서 빼앗아서,
약삭빠른 후배에게 남김없이 준다.
아키라는 새까만 암흑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커튼 틈새로 달빛이 스며드니 방 안이 훤했음에도 왜인지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다. 밤도 곧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아키라는 감흥 없이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이와이즈미는 단골손님이었다. 텅 빈 머릿속으로 천장을 훑으면 스리슬쩍, 다부진 눈매가 떠오른다. 손을 뻗어 쓰다듬고 싶다. 아키라는 고집을 부려 이젠 정말 눈을 감았다. 이와이즈미는 눈꺼풀 안쪽까지 비집어 들어온다. 그리고 그 표정을, 잔뜩 겁에 질린 그 표정을. 곧 죽는 주제에, 그렇게 다른 사람의 불행을 두려워하고.
내가 오이카와 씨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 아키라는 담담하게 판정했다. 만약 이번 여름에 죽어 나갈 사람이 쿠니미 아키라가 아니라 오이카와 토오루였다면, 이와이즈미는 절대 이런 상황에 몸 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오이카와 옆의 이와이즈미는 쉽게 떠올랐다. 얄팍한 눈꺼풀에 화려하게 생긴 주장을 그려 넣으면, 더불어 이와이즈미가 선명해진다. 둘이 한날한시에 죽는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남은 날 동안 사방을 돌아다니며 추억을 쌓을 지도. 아니면 방 안에 틀어박혀서 쉬지도 않고 섹스하면서 사랑을 속삭일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니 따끔거리는 심장에 코웃음이 비집어 나왔다. 베개에 마구잡이로 문댄 뺨이 따갑다. 며칠 안 남은 소중한 밤을 이따위로 보내고, 그도 이와이즈미도 불쌍한 인생들이 아닐 수 없다. 잠은 포기하고, 아키라는 스스로에게도 안 들릴 정도로 숨결처럼 속삭였다.
안심할까? 같이 죽어서?
막 피어나는 여름에는 눈길도 주지 않곤, 곧 생일을 맞을 이만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질리는 기색도 없이 또 생각하고…….
오이카와 씨였어도, 이렇게. 이렇게 그 날이 기다려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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