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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시야마는 교토를 방문한 여행객들이 일 순위로 고려하는 유명한 관광지다. 교토 특유의 고즈넉한 정취가 온 지역에 짙게 깔렸다. 벚꽃이 흐드러진 봄이나 울긋불긋한 단풍이 만발하는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곤 하나, 가끔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에도 먼 곳에서 굳이 발걸음을 한 이방인들로 거리는 북적였다. 타국의 관광객뿐만이 아니라 겨우 휴가를 맞춘 도쿄의 가족이나 가볍게 나들이를 나온 오사카의 연인, 그리고 곧 졸업을 맞을 전국의 최고참 청소년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니까, 겨울 온천을 고집하지 않은 한가로운 일본인 전부가 말이다. 모두가 한산하고 쓸쓸한 일본풍 거리를 즐기려고 왔을 것이다. 미야기의 최고참 청소년 두 명, 나와 이와이즈미도 그랬다. 다른 여행객처럼 우리는 JR을 갈아타고 사람 빼고는 휑한 아라시야마의 기차역에 내렸다.



사실 이와이즈미는 온천을 가고 싶은 기색이었다. 그 애는 좀 아저씨 같은 구석이 있어서, 눈꽃축제가 한창인 삿포로나 도와다호에 가서 뜨끈한 물에 몸을 지지고-정말이지 아저씨가 따로 없다!-싶어 했다. 지난 십여 년간의 나라면 ‘그럼 완벽한 계획을 손수 짜주지!’ 라며 호언장담을 하곤 유카타를 챙기러 온 집안을 헤집었을 것이다. 물론 그전엔 이와이즈미의 유카타를 챙기러 그 애의 집에 쳐들어갔을 테고.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초등학생도 수학여행으로 방문하는 아라시야마를 주장했다. 그럴싸한 이유만 있다면 누구와도 단둘이 갈 수 있는, 아주 보편적인 선택을. 삿포로에 갔다면 정말 두근거렸을 것이다. 오붓하게 료칸에 눕고, 단둘이 물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발간 뺨을 한 이와이즈미를 마주했을 테지. 짝사랑을 정리하는데 온천은 너무 뻔한 장소였다. 정말 그랬다.

“도게츠교는 ‘달이 비치다’라는 시구에서 따온 거잖아.”



그 애는 다리 밑의 탁한 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직 낮이라 강에는 뿌연 구름과 햇살을 얹은 비늘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와이즈미의 한마디로 이리도 손쉽게 기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놀라며 답했다.



“이와쨩 평소에 그런 거 관심도 없었으면서!”

“뭐어.”



나를 흘끗 보곤 다시 산등성이로 눈길을 돌린다.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았다. 저런 간질간질한 대사를 내는 건 보통 나였다. 그걸 알아채곤 먼저 이야기해주는 이와이즈미가 참 상냥해서, 나는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잔뜩 놀릴 타이밍인데. 아까 숲을 헤치고 나올 때부터 실연한 찌질이마냥 기운이 맥을 잃었다. 하긴 고백도 못 하고 포기했으니 비유랄 것도 없었다.



나는 여행경로를 적어둔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이 기나긴 여행도 끝이 보인다.



유명한 관광지가 흔히 그렇듯, 이곳도 관광 스팟이나 코스가 정형화된 편이었다. 역에서 내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대나무숲 치쿠린이 나왔다. 빽빽한 대나무와 사진기를 든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면, 사랑을 이루어준다는 노노미야신사가 지친 방문객을 맞이한다. 웨딩 촬영과 영원한 사랑을 비는 커플들로 가득한 곳에서 우린 머쓱하게 합장 흉내만 내었다. 노노미야의 보편적인 소원 말고 다른 생각을 하기 참 어려웠다. 변명일 테지만, 정말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만이 어색했던 것 같다. 찔리는 구석이 있어 그러지.



“괜찮냐? 아까부터 말이 없네.”



정작 교토까지 온 주제에 사랑을 이루어 달라는 파렴치한 소원을 빌어서 그래. 이 성가신 짝사랑을 끝장내버리기로 마음먹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오이카와 씨가 생각보다 양심이 있는 모양이야. 신경 쓰지 마, 이와쨩.

“음음, 더워서 그러나~”
“힘들면 오늘은 좀 쉴까? 그 베이커리라도 가던가.”



이와이즈미가 다정한 걸 보니 내가 정말 시들시들하긴 한가보다. 이놈의 소꿉친구는 나에게는 유독 안 그런 척 사려 깊어서,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어영부영한 변명까지 튀어나온다. 나는 그 애의 호의를 받아들일까 잠시 망설이다 경쾌하게 고개를 저었다. 곧 텐슈지가 코앞이었다. 평범한 친구 두 명은 성실하게 계획을 따르고 평범하게 여행을 마무리할 것이다. 상대가 나를 위한다는 사실에 흡족해서 꽁꽁 싸매어 두는 것이 아니라.



“금방 도착인데, 뭘.”



가볍게 너스레를 떨곤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앞서나갔다. 정말 목적지가 근처였다. 시시한 기념사진 몇 장을 찍고, 미야기로 돌아가야지. 그러고 나선 짐을 싸고, 이별할 준비를 하고, 어찌 되었건 정신없이 바쁠 것이다. 우울할 틈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보잘것없는 감정은 곱게 분리수거 되겠지. 나는 생각을 털 듯 고개를 저었다. 어서 가자고 재촉할 셈으로 이와이즈미를 돌아보았다. 이와이즈미가 막 차도에서 인도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그때, 괴상하게도 온 세상이 숨 막힐 정도로 느려졌다.


무언가 아주 느릿느릿하게 이와이즈미를 향해 달려왔다. 얄팍한 눈꺼풀이 천천히 안구를 덮었다 다시 올라간다. 싸한 소름과 함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한 발짝 늦게 등어리를 적셨다. 이와쨩. 이와이즈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코앞까지 들이닥치는 트럭 앞면을 보는 얼굴에선 아직 공포를 찾을 수 없다. 이와쨩. 다리가 돌덩이처럼 굳어 땅에 박힌 것 같다.



무시무시한 굉음이 났다. 발치에는 시뻘건 피가 잘게 튀어있었다. 가느다란 줄기로 흐르는 것도 있었다. 나는 그게 피라는 걸, 단번에, 아니.

“이, 이와쨩.”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어깨를 치고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마법처럼 아까까지 다리를 옭아매던 주박이 풀려 비틀비틀 뛰어갈 수 있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뿌연 안개처럼 귓가를 어지럽혔다. 꽤 먼 거리를 두고, 길 한가운데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이상하게 두렵거나 꺼려지지 않았다. 나는 이와이즈미 옆에 무릎을 꿇은 채로 떨어졌다. 그리곤 그 애가 숨을 멎는 순간을 보았다.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려 차 쪽을 보았다. 심장이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운전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그곳에 트럭이 깔끔하게 주차되어 있고, 이와이즈미만 버려진 헝겊 인형처럼 앞에 떨구어 있었다는 듯이 고요하다.

이건 무슨 악몽이지?

덜덜 떨리는 손가락 끝이 뻣뻣한 뺨에 닿았다. 누군가 나를 저지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사람이 굉장히 많았고, 나를 뒤로 끌었다. 내가 자꾸만 그 애를 껴안으려 했기 때문인가. 이와쨩이 죽었어? 그 말의 음절을 따라 시야가 새까맣게 깜빡거린다. 나는 너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정말?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되물었고, 덤덤하게 이리 말했다. 다행이네. 나는 홀린 듯이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아냐, 안 죽었는데. 그냥 많이 다친 거에요. 여러 개의 신발이 어지럽게 그 애를 감싸서 이젠 보이지도 않았다.



이건 꿈이다. 꿈이어야 했다. 곧 깨어나면 우린 다시 따분한 교토 여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을 조금만 되돌리면, 그래. 되돌리면 분명히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그렇지 이와쨩. 입술이 버석거리며 속삭였다. 꼭 남의 살덩이 같았다.

그래 줄 거지.






“도게츠교는 ‘달이 비치다’라는 시구에서 따온 거잖아.”
“…….”
“오이카와?”


작고 꺼슬한 손바닥이 뺨을 감쌌다. 나는 깜빡 존 사람처럼 퍼뜩 고개를 들어 그 애를 마주 보았다. 시큰둥한 녹색 눈에 금세 걱정이 서린다.



“너 엄청 창백해. 괜찮냐?”

“이와쨩.”



나는 대꾸 없이 살아있는 그 애를 끌어안았다. 따스하고 단단한 품을 안고서야, 내가 조금도 떨지 않은 채로 그 애를 죽어라 붙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코를 박고 있던 어깨에서 고개를 들자 아까의 그 거리가 보였다. 핏자국 없이 말끔한 차도가 낯설었다.



낡은 트럭이 쌩하고 시야를 지나쳤다. 운전사는 모자를 쓴 사십 대 남성이었다. 이와이즈미는 팔뚝이 아프다며 가볍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애가 호흡하는 걸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왜 이렇게 찰싹 달라붙어, 징그럽게.”
“오이카와 씨 너무 춥다고~”

오기를 부린 것 같다. 금방이라도 이와이즈미를 데리고 이곳을 뜨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꿈이라고 치부했다. 지금 도망치면 방금의 악몽이 진짜 일어났던 일이라고 인정하는 기분이었다. 애써 도착한 금각사 지붕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있어 고요한 풍경을 자아냈다. 호수 속에는 하얀 지붕에 금빛 벽을 두른 사찰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고개를 좀 더 내미니 발간 볼을 한 남자애도 보였다. 입김이 뻐금뻐금 올라오고 있었다. 옆으로 불쑥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 튀어나왔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나와 함께 호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상체를 너무 숙여서 주의를 주려던 찰나에 이와이즈미의 몸뚱아리가 훽, 뒤집혔다. 쩌렁쩌렁하게 물이 튀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바닥이었다.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나는 얼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호수에서는 나만이 건져졌다. 시체를 수색해야 한다는 경찰들의 다급한 대화를 들으며 나는 소리를 질렀다.

“다시!”






아무리 손이 둔한 사람이라도 세 번 정도 하면 익숙해진다. 무엇이든, 그러니까 가장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라도.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절망적인 감각은 도무지 닳지 않았지만, 나는 그애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경우의 수를 외웠다. 늘 하던 거야. 스파이크를 막고, 적의 동선을 외우는 것처럼, 늘 하는 일. 이와이즈미의 말마따나 앞으로 일 점, 한 번만 살리면 될지 언데. 나는 징그럽게 낡아빠진 문장을 다시 갈았다.

어떻게 하면 이와이즈미를 살릴 수 있지?

더 이상 흐느끼지도, 애도하지도 않은 채 오직 그것만 생각했다. 순환은 몹시 간단했다. 이와이즈미가 죽으면 반사적으로 시간을 돌리기를 애타게 바랐다. 그러면 교토의 어느 날 시점에서 다시 숨을 쉬는 이와이즈미와 함께 눈을 뜨는 것이다. 별별 짓을 다 해보았다. 세 번째에는 이와이즈미의 손목을 쥐곤 냅다 돌아가는 기차를 타러 뛰었다. 충돌사. 어리둥절한 이와이즈미를 끌고 숙소로 돌아와 모든 문을 다 잠그고 버텼다. 화재로 인한 질식사. 너덧 번은 그저 찰나에 떠나보냈다. 감전사. 드디어 이 끔찍한 장소를 벗어날 수 있겠다 싶으면 낯선 이가 칼을 들고 덤빈다. 나는 반쯤 미쳐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 죽음들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손 쓸 도리도 없이 죽는다는 것이다. 이러면 시간을 되돌려 주는 이유가 뭐야? 무엇이 목적이어서 이 짓거리가 계속되는 거지?

그래도 도무지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눈이 쌓인 숲 앞에 이와이즈미가 서 있다. 점점 한계라는 게 느껴진다. 이와이즈미와 어쩌면 영원한 하루를 영위하며 살 수도 있다. 사고로 있을 수 있는 죽음들. 이별. 일상적인 불확실성은 이 루프 안에서 의미가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루프가 다행인 게 아닌가? 어차피 죽으면 다시 살아나고. 평소 같았으면 돌아버렸다고 생각할 문장들인데, 자꾸만 맴돌았다. 내 실패를 합리화하려는 발버둥들. 그러나 영원을 즐기기에는, 인간의 죽음은 끔찍이도 불결하고 구역질이 났다.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워 하며 죽는 이와이즈미를 보면 줄곧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와이즈미는 이 끝없는 루프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너를, 내 욕심만으로 고통을 주는 거라면. 나는 홀린 듯이 입을 떼었다. 수없이 많은 루프 중 한 번이라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다.

“이와쨩.”
“어.”
“내 말 들어야 해. 미친 것 같겠지만 들어봐.”
“말해 봐.”
“너 내 앞에서 스물여섯 번 죽었어. 그리고 아마 곧 스물일곱 번째로 죽을 거야. 응? 한 번만 더 죽으면 나도.”
“뭐?”
“…….”
“…진정하고 이야기해봐.”

이와이즈미는 침착해 보였다. 우린 늘 그랬다. 한 사람이 평정을 잃으면 다른 하나는 침착하게 받아주었다. 초신뢰관계잖아, 그렇지? 나는 자랑하듯 종알댔지만 이와이즈미가 이토록 쉽게 나를 믿을 줄은 몰랐다. 우리 둘은 못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잉어떼를 내려다보았다. 햇살이 녹조 낀 물에 떨어져 푸르게 빛이 났다. 교토에 와서 잉어는 처음 보는 것이다. 닳고 닳은 여행 중에도 처음 보는 광경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조용히 못을 내려다보았다. 연못에 비친 이와이즈미는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 애는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뜬금없이 이리 말했다.

“고생했네.”

그 말을 들으니 진짜 이와이즈미와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가 죽을 운명이 확정되어도, 나를 걱정하는 이와이즈미 하지메. 수없이 많이 이와이즈미를 살리면서, 나는 이 모든 게 환상은 아닐까 의심했다. 나의 자기만족은 아닐까.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힘 빠진 미소를 짓자 이와이즈미는 어이없다는 듯이 덧붙였다.

“근데 그걸 처음 말하는 거야? 스물 일곱 번 중에?”
“응.”
“이 머저리가…….”

그렇지만, 너는 내 꿈속의 이와이즈미 하지메잖아. 너에게 이리 말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나는 기어코 깨닫고 말았다. 너에게 사랑을 구걸하기 전까지는 이 지겨운 꿈을 깰 수 없을 것이다. 이와이즈미와 멀어진 삶은 살기 싫다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형편없는 어리광에 장단을 맞추어 준다. 한마디면 이 악몽이 끝날 것을. 숱한 이와이즈미의 죽음을 보고 나니 두려운 것이 하나 생겼다. 텁텁한 한숨을 가만히 맞으며 털어놓았다.

“이와쨩이 그만두라고 할까 봐 무서웠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그 애는 몹시 당연하게도 답을 했다. 나는 내가 꼭 원하던 말을 하는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네가 나 없이 어떻게 사냐.”






어릴 적부터 기적이나 운명을 믿지 않았다. 산타클로스를 철석같이 믿은 꼬마도 내가 아닌 이와이즈미였다. 유치원을 다닐 때, 그 짧았던 기간 동안 이와이즈미는 겨울만 되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은지 물었다. 산타가 무얼 줬으면 좋겠는지. 그러곤 울음이 많던 나에게 선물을 받기 위해선 울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걸 듣고서도 굳이 울음을 멈추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눈물을 터뜨리면 하지메쨩이 달려와 줬고, 애초에 나는 그 산타라든지 선물이라든지에 큰 관심이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삐뚜름한 의심을 한 것이 기억이 난다. 산타가 뭐길래 내가 원하는 것을 아는가. 커다란 양말에 운동화나 게임기를 넣어주는 멍청한 할아버지가? 여섯 살 먹은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저 크리스마스에 이와이즈미와 케잌을 먹거나 눈싸움을 하며 놀고 싶었다. 내가 무얼 진짜로 원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내가 아니고서는.

열세 번째 루프였나.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노노미야 신사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귀를 쫑긋 세운 수호수 앞에서 연인들은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길 빌었다. 물을 떠서 손을 씻는 이와이즈미 옆에서, 나는 붉은 줄이 달린 종을 노려보았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소원을 빌어서 그래? 사랑을 이루어달라는 그 소원이 신의 심사를 비틀었을 수도 있었다. 포기한다면 이와이즈미를 온전히 보내줄 텐가. 동전을 던지고 그저 친구로 남겠다고, 하찮은 맹세를 읊조리면 미야기로 우리를 풀어줄텐가.

허나 모두 망상이다. 그 애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온갖 수단을 검토하면서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스물일곱 번째 이와이즈미는 긴 잠에 빠진 것처럼 숨이 멎었다. 볼 수 있는 죽음은 거의 다 보여줬으니, 마지막은 성의 없게 꾸민 것 같았다. 인적이 드문 야산이라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애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결심이 필요했다. 여태껏 쌓아온 것들을 망칠 한심한 결심을 서서히 세웠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이와이즈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






다시 우리는 노노미야 신사에 서 있었다. 손을 씻고 종을 울리고 동전을 던지는 등 소원을 비는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수행한 이와이즈미가 스리슬쩍 한쪽 눈꺼풀을 밀어 올리곤 나를 봤다.

“무슨 소원 빌었냐?”

전 여친 카즈야랑 다시 잘 되게 해주세요. 붉은 신사에 처음 온 오이카와 토오루는 영악하게도 그리 말했다. 까마득하게 오래된 대사를 밀어두곤, 나는 여태껏 외면했던 말을 집었다.

“네가 날 사랑하게 해달라고 빌었어.”

나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다. 기어코 진심을 맡기고 만다. 해명할 껀덕지도 없는데 마음은 차분하다. 이와이즈미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고백을 알아듣고 있었다. 아마 받아들이기도 할 것이다. 훨씬 느리겠지만.
이와이즈미의 답변보다도, 어서 이 꿈이 깨기만을 기다렸다. 바로 승락을 바랄 정도로 되바라지진 않았다. 단지 하나만을 원했다. 징그러운 내 무의식이 어서 나와 이와이즈미를 놓아주기를. 네 원대로 나는 고백을 했다. 이 정도 해줬으면 이젠 우리를 보내줘야 하지 않아? 입을 딱 벌린 채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는 이와이즈미는 평생이라도 볼 수 있는 재미나고 사랑스러운 광경이지만 말이야.

그러나 기다림은 예상보다 아주 길었다. 한참은 남은 교토의 봄을 기다리는 것처럼 이 꿈엔 도무지 금이 가지 않는다. 꼭 현실인 것 마냥. 그토록 바라왔던 소망이 이루어진 것 마냥.






“일어나. 굼벵카와.”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부스스 눈을 떴다. 나보다 낮은 어깨라도 오래 쓴 베개처럼 편안했다. 냉기가 희미하게 창 주변에 쌓여 있었다.

“다 왔어, 미야기야.”
“그래?”

우리가 없는 동안에 새로 눈이 왔나 보다. 잠긴 목소리로 그러냐며 대꾸하자 이와이즈미는 내가 비몽사몽 꿈 속에서 헤맨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이와이즈미 뺨의 솜털까지 보였다. 나는 문득 이게 꿈인지 의심이 피어올랐다. 가볍게 그 뺨에 입을 맞췄다. 몹시 어색해하는 게 눈에 보여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표정 진짜 못생겼다, 이와쨩. 그렇게 놀리려던 찰나에 이와이즈미가 꾸물꾸물 손을 잡아왔다.

“어, 멍청아.”

놀라진 않았다. 오이카와 씨는 이런 거에 흠칫 놀라는 초짜가 아니니까. 지금 완전 차분하니까. 아직도 바로 곁에 있는 이와이즈미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귀가 뜨겁다. 억울해져서 그만 느근하게 깍지를 파고들었다. 이와이즈미는 정말 새삼스럽게도 주변을 신경 쓰는 눈치였지만, 무의미한 걱정이었다. 버스에 내려서 짐을 꺼내려는 사람들로 금세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우리 둘은 인파가 잦아들 때까지 손을 맞잡고는 적당히 게으름을 부렸다.

“…이와쨩. 다음엔 그냥 삿포로 가자.”
“그러든가.”

삿포로만큼은 아니겠지만, 미야기에는 눈이 펑펑 쏟아졌나 보다. 덕분에 눈에 새겨진 이와이즈미의 발자국대로 가만히 걸을 수 있다. 그 애의 주장과는 다르게, 이와이즈미는 나보다 다리가 짧아서 보폭은 조금 좁지만. 폭신하고 찰박이는 징검다리를 밟으면 다정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이와이즈미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는,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망상. 이제 나는 이와이즈미를 연인이라 부를 수 있다. 심장이 호들갑을 떨며 뱃속 싶은 곳부터 만족이 차올랐다.

나는 새하얀 길을 걸으며 방금 전의 오래된 꿈을 생각한다. 단둘이 떠나는 겨울 여행만큼이나 짝을 잃은 장갑의 결말은 뻔하다. 그게 퍽 마음에 들었다. 꿈은 방울처럼 터졌고, 이와이즈미를 잃은 오이카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사랑하는 이의 뭉툭한 손아귀를 잡은 오이카와만이 현실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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