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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오이카와 토오루









갈취


오이카와의 생일은 그럭저럭 즐거운 날이다. 배구부 애들과 도모해서 깜짝파티로 오이카와를 골탕 먹일 수도 있고, 헤실거리는 멍청한 얼굴도 꽤 봐줄 만 하니 말이다. 다만 7월 20일 등굣길 위에서 눈을 반짝이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생일인 폭군의 첫 갈취 피해자는 언제나 나로 정해져 있었다. 언젠가 생일이 끝날 무렵에 맞춰 선물을 주려 하던 나와, 내게서 선물을 받아내지 않으면 기어코 등교하지 않겠다는 고집 센 놈과 길에서 난리를 피워댄 적이 있었다. 그 미친 놈은 길바닥에 심지어 들어누우려고 까지 했다. 뻔히 보이는 울먹이는 행세를 하며. 아침 일찍부터 대체 오이카와를 어디에 묻어두고 왔냐는 질 나쁜 농담을 듣기 싫어 겨우겨우 건넸었다. 억울함에 왜 항상 첫 타자가 나냐고 물으니 "이와쨩의 괴상한 선물을 제일 먼저 받아야, 다른 선물에 더욱더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겠어?"라는 둥 괘씸한 소리를 지껄였다. 나름의 전통이란다. 더 반박하기에도 기가 차서, 빨리 제사가 끝나길 바라는 어린애처럼 그저 순순히 선물을 내놓았다.

사람을 오래 사귀다 보면 선물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쉬이 알아차리게 된다. 그렇다고 저리 기대하는 데 없다고 딱 잘라 말하기도 애매한 것이다. 무얼 골라야 할지 골머리를 앓는 시간만 길어지고, 정작 고민을 쥐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아침 나발부터 선물을 갈취할 생각에 신이 나 있다. 그런 탓에, 날이 길어지면 자연스레 오이카와의 선물을 고민하게 되었다.

전에는 길 가다 나에게 향수를 대뜸 뿌려대곤, "오, 냄새 좋다." 라며 오이카와는 깔깔 웃었다. 향수가 궁금하면 제 팔에 실컷 뿌리면 되지, 어지간하게도 귀찮은 놈이다. 하여간 이번 생일 선물로 그 향수를 사다 주었더니, 오이카와는 학교에 다다를 때까지 울다가, 웃다가 쉴 새 없이 시끄러웠다. 웃는 게 괘씸해서 두어대 때리면 아프다고 부러 우는 행세를 하다가, 다시 향수를 들여다 보곤 숨 막히게 웃다가 기어코 눈물을 흘린 것이다. 발개진 눈가를 보고 지나가는 모든 애들이 "생일인데 작작 좀 패지."라며 입을 모아 말을 하니, 나는 정말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간 그놈의 고급 향수를 위해서 간식도 꼬박 거르며 고생한 건 누군데. 연신 나를 돌아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씨익 웃어 보이는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주먹이 절로 박차고 나가려 하지만, 뭐, 그래. 7월 20일은 그 녀석 생일이었다.








마무라


주장 선배는 오이카와의 생일을 챙기기 귀찮았는지 몇 마디 말만 입에 내었다. 오이카와가 차기 주장으로 뽑혔단다. 1학년과 2학년의 투표로 결정된 것이니, 딱히 선배가 주는 선물도 아닌데 말하는 폼이 퍽 당당했다. 오이카와는 수줍은 미소를 숨기느라 재수 없는 표정을 뒤집어쓰곤 잘 부탁한다며 유난을 떨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덧붙일 말이 없었다.

"서브 연습만 하지 말고 애들 토스 요령도 가르쳐 줘."
"하고 있는데. 역시 좀 더 늘려야 하나?"
"마무라도 세터로 전향하고 싶다는데. 인원이 느니까 아무래도 야하바한테 일단 봐주라고 할까? "
"엑? 마무라 미들 지망 아니었어? 나한테는 그런 말 없었는데. 왜 갑자기 세터지?"
"글쎄, 널 보고 멋지다고 생각해서 그럴걸."

교실에서 평소처럼 주고받았던 대화의 공이 툭 떨어졌다. 옆을 바라보니 오이카와가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잠깐, 뭐라고?"
"너…이제 일본어도 못하는 거냐."
"나 언어 점수 이와쨩 보다 높거든? 그나저나 마무라말이야!"
"이번 예선 준준결승 2세트 중반 그 공."
"응."
"그거 보고 반한 것 같은데."

다시 돌이켜봐도 손맛이 얼얼한 공이었다.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의 숨이 멎는 소리가 놀랍게도 들렸다. 마무라는 심장을 토하려는 기세로 그 순간의 토스가, 타이밍이, 이어진 속공이, 판단이 얼마나 근사한 지 쫑알거렸다. 아, 말하지 않아도 알지.

오이카와의 뺨이 형편없이 새빨개지는 걸 관찰하는 건 꽤 재미났다. 하늘 아래 자기가 최고라는 듯 굴 때는 언제고, 저런 바보 같은 표정 지어대지. 직접 말하기 쑥스럽다는 마무라가 저 얼굴 꼴을 봐야 했는데.

"그렇구나."

흐물흐물하게 책상에 댄 옆모습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한참이나 오므리더니 간신히 무언가를 뱉어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뽑아내었지만, 귀는 여전히 새빨갰다.

"팔 근육은 튼튼하고 폼도 빨리 배우니까, 뭐어... 공 컨트롤은 떨어지지만 죽어라 연습하면 겨울엔 꽤 띄울 수 있겠지."
"그래."

죽어라 연습하면.








인터하이


죽어라 연습해서 되는 것도 있고 못 되는 것도 있다. 한순간의 변덕인 듯했던 마무라는 죽어라 연습했고, 겨울엔 연습 시합에서 한 세트를 세터로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오이카와가 졸업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스타팅은 커녕 레귤러로도 발탁되지 못할 것이다. 아오바 죠사이에 마무라만큼 열심히하는 세터는 널리고 널렸다. 오직 한 자리. 팀의 유일한 포지션. 그 자리는 당연하다는 듯 오이카와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도 툴툴거릴 생각조차 못 했다. 오이카와는 아오바죠사이의 널리고 널린 세터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열심히 하는 선수였다. 범위를 모든 부원으로 늘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등짝에 주장 마크와 1번을 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죽어라 연습해서 안되는 것도 있다.

씻고 온다는 녀석이 늦어 세면대에 가보니 역시나 어설프게 눈을 꾹 감고 수도꼭지에 머리를 드밀고 있었다. 유난스럽게 머리를 사수하는 녀석이 뒤꼭지에 물을 끼얹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생크림이 안 씻기나 보다. 미끈한 콧대와 턱선에서 물방울이 뚝뚝 흐르고 흘러 유니폼에 젖어 들었다. 오이카와는 애처럼 요령이 없었다. 조금 더 다가가니 어찌 알았는지 젖어서 잔뜩 엉긴 눈꺼풀을 밀어올리며 눈을 깜빡인다. 한심한 꼬락서니에 말을 툭 뱉었다.

"너 완전 아저씨 같아."
"이와쨩은 매일 이러잖아!"

나는 적어도 머리 감으려다가 샤워하진 않는다고 반박하려다가, 목덜미에 아직 남아있는 생크림에 손부터 나갔다. 거칠게 훔쳐내니 뻔뻔하게 내 손가락을 잡고 슬쩍 핥는다.

"더럽게."
"더럽다니! 오이카와 씨는 침도 향긋하거든요."
"아, 그러셔."
"마치 향수처럼!"

그리곤 오이카와는 다시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새끼한테 다시 선물 사주나 봐라…

"가자. 멍청카와. 연습 곧 시작이야."

부주장의 주요 업무가 주장 찾기라니 세이죠 배구부가 미쳐 돌아가는 게 분명하다. “버릇을 잘못 들인 건 너지.”라며 슬쩍 웃던 마츠카와가 떠올라 골이 울린다. 오이카와는 내가 대꾸를 안 하자 눈치를 살살 보다가, ‘연습’이라는 단어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응응, 그래……연습."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니. 본선이 벌써 다음 주구나 싶어서."라는 고해성사를 재깍재깍 늘어놓는다. 오이카와의 생일은 늘 인터하이 전국대회 전 주에 있었다. 그 말인즉슨 이런 대화가 육 년간 지긋지긋하게 이어져 왔다는 소리다. 대답도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르면 입 밖으로 쏟아내라. 화풀이하려면 하고. 눈앞의 한걸음에 집중해.

온갖 감정을 꾹꾹 눌러삼키고 있을 줄 알았던 얼굴은 예전과 달리 고요했다. 오이카와는 조그만 머리통으로 곰곰이 생각하다가,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나는 말을 더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오이카와가 “이기자.” 라고 담담하게 말해 올 때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의 오이카와와 박자까지 닮았다는 걸 알지만, 더 할 말이 없었다. 벅차게 달려야 연습 시간에 늦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는 인생을 참 피곤하게 산다. 어딘가에 정착하는 법이 없이 늘상 새로운 길을 닦았다. 갖은 힘을 다 써서 힘겹게 힘겹게 모래성 하나에 자기 깃발을 꽂으면, 금방 무너뜨려 버리곤 더 근사한 것을 찾아 나선다. 그런 식으로 수도 없이 성을 무너뜨린 후에 드디어 으리으리한 성에 거만하게 앉았다고 해도, 바로 다음 순간에 박차고 나와 여정을 떠날 것이다. 더 위로. 제일 정점을 밟기 위해.

나는 정상에 선 오이카와를 상상해보았다. 애석할 정도로 쉬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정상에 가만히 앉아 있는 오이카와는 비현실적이다. 그보다는 파도로 만든 산을 오르는 오이카와가 차라리 있을 법했다. 오이카와는 정상을 밟을 수 없었다. 꼭대기를 밟는 순간, 오이카와는 더 높은 곳을 자신의 두 손으로 만들 거다. 자신이 좇을 영원히 닿지 않는 별을 직접 하늘에 박아넣겠지. 그럴 때의 오이카와는 쉴 새 없이 반짝거려서 눈이 시렸다. 가끔은 등어리가 오싹할 정도로 소름 끼치기도 하고, 때로는 우스운 동정심에 잠도 오지 않았다. 어쨌거나 오이카와는 그런 놈이고, 그런 지독한 악질보다 더 대단한 세터가 나올 리가 없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최고의 세터다. 어떠한 망설임도 감동도 없이 이 문장을 읊을 수 있었다. 그만큼 어처구니없게도 당연했다. 지금 당장, 혹은 언젠가. 언젠가는 그 자리를 꿰차고 또다시 목마름에 허덕이겠지. 그 때면 온 세상이 알게 될 터다.

그러면 아무리 오이카와 토오루라도 믿지 않을 수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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