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로얄에서 우승한 후의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
고어 묘사는 제가 못 봅니다. 없어요!
취향주의.
"우린 우승해야 해."
그 말이 거센 물줄기처럼 모든 것을 쓸어내렸다. 떠밀려 내려가는 난잡한 흐름 속에서 이와이즈미는 여느 때와 달리 헛손질을 했다. 이번만은 건져낼 오이카와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이즈미는 그가 머뭇거리며 돌려 말하기를 기다렸다. 헛된 강요였다. 둘 모두가 결말을 알고 있었다.
"……말해봐."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우승하지 않으면 우린,"
"아니."
잔뜩 긴장해서 현실을 토해내려는 걸 끊었다. 오이카와는 꼭 이와이즈미가 자신에게 실망하여 등이라도 돌릴까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하여간 멍청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죽여달라는 요구가 아닌 이상, 그가 오이카와를 거절할 상황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물며 오이카와는 죽여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로 나약하지도, 강인하지도 않았다. 그저 살고 싶어 할 뿐이다. 이와이즈미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옅은 빛깔의 눈동자는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과는 달리 차분했다. 이와이즈미는 그 역시 태연하게 보이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허나 뜻한 바 대로 평소 같은 덤덤한 목소리가 나오자 오히려 기시감이 등허리를 기어다녔다.
"계획이 있잖아."
간파당하면 꼭 그런 표정을 짓지. 재수 없게도, 익숙해지질 못하고. 표정을 헤아리자 그제야 심장이 숨을 고른다. 오이카와다. 제 옆에 있는 건 바로 그의 파트너였다.
"……."
"뭐든 괜찮아."
이보단 더 어렵고 무서울 줄 알았는데. 사람을 죽이려는 계획은 생각보다 손쉬웠다. 어쩌면 배구의 포메이션 전략 보다도. 배구는 6명이 함께 하는 것이지만 살육게임의 우승은. 이와이즈미는 꼭 그러면 현실이 뒤바뀔 것처럼 눈을 감았다 떴다. …그보단 적었다. 그래서 더욱 손쉬웠다. 살려야 할 사람이 적을수록 간단해진다. 그런 게임에 끌려와 있었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들릴 때부터 견제당했다. 체격이 탄탄하고 만만찮아 보이는 분위기를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둘 중 한 명만 게임에 참가했다면 무난하게 무리를 이끌 수 있었을 터다. 그러나 둘은 함께였고 그 신뢰는 더더욱 눈에 쉽게 띄웠다. 저 둘과 한 팀이 되었다가는, 모든 걸 해치우고 난 후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하는 건 나겠구나. 둘 사이에서 최후에 남을 수 있는 기회 따위는 없구나.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일찌감치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처음부터 오로지 둘 뿐이었다.
게임에 선행된 ‘생존 캠프’에서 이와이즈미가 가장 우수했던만큼, 우선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험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을 목표로 하는 온건 노선을 탔다. 이렇게 조금만 버티면 되지 않을까. 하루는 운이 좋게도 식수를 구할 수 있는 샘을 찾았다. 또 다른 날엔 연기를 최대한 죽이려 모레 틈에 묻힌 불꽃이 일렁거렸고, 누구든 서로의 굳은 어깨에 기대면 긴장이 풀렸다. 오이카와가 예측했던 동선이 맞아 떨어져 무리와 직접 대면하는 일은 없었다. 평온은 그런 식으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탔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언제든 무기를 휘두를 준비를 했다. 입도 벙긋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같은 생각인 걸 알았다. 승낙이 떨어질 것을 알기에 도리어 물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조금만 버티면 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그러나 섬에 있는 모든 이가 사냥감이었다. 또한 숨을 앗아가는 사냥꾼이었다. 살육은 외면하는 배구 선수들의 뺨을 움켜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곧 내가 입을 맞추면, 넌 꼼짝없이 내게 삼켜질 거라고. 과거와는 아주 다른 세계를 보여주겠다고.
예닐곱 명이 모인 가장 큰 무리는 ‘사냥’을 시작했다. 수풀이 우거진 섬에 알맞은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참여자의 사망을 알리는 축포는 밤이건 낮이건 온 신경을 헤집어놓았다. 축포가 다섯 번이 넘어가자 오이카와는 망설이며 입을 떼었다. 이미 머릿속에선 여태 습관, 성격, 관계 모두를 파악했던 사냥감들이 철저한 방법으로 제 손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땋은 머리 여자는 왼손을 다루는 데에 서툴고 활잡이는 무리를 형성하기엔 너무나 의심이 많다. 갈색 머리 꼬마는 의지하던 상냥한 보호자만 죽이면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이다. 폭발물을 다루는 능력이 특히 성가시니까, 다른 이들은 영입하려고 꼬마를 구워삶겠지. 그건 착각이야. ……역시 눈 앞에서 죽이는 게 효율적이겠지. 밤이 내리면 수많은 가설과 전략들이 그의 숨통을 틀어 잡고 채찍질을 했다. 빨리 해, 못 한다면 이와이즈미가 죽임 당해! 다른 새끼들 역시 이런 식으로 이와이즈미를 해부하고 있어. 생존능력 최우수, 근거리 최우수, 중근거리 우수, 어떤 무기든 손에 익었으며, 도발이 어렵고 몰이도 어렵다. 상당히 까다로워 보이지. 그치만 말이야, 있지, 이와이즈미를 죽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우선 오이카와 토오루를 죽여버리는 거야!
고개를 들자 이와이즈미가 보인다. 눈을 감으면,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쥐고 있다. 살육을 권한 오이카와를 처절하게도 원망한다. 그리고 시체 냄새나는 암막을 밀어내고 눈을 뜨면 ‘뭐든 괜찮아’라고 대답하는 소꿉친구가 자리했다. 그 모습에 헛웃음 조차 터지지 않는다. 오이카와가 아무리 잔인하게 굴어도 이와이즈미는 끝까지 곁을 지키리라는 걸 알았다.
결말은 두 갈래뿐이다. 영영 죽어버리거나, 살인자로 함께 살아남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오이카와는 일단 그 무리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대신, 쥐도 새도 모르게. 꼭 무리 안에서 누군가 죽인 것처럼. 두 무리가 연합했기에 감정싸움은 충분히 빈번했을 터였다. 며칠 전 사냥 도중 그들 한명이 죽었으니, 언제 끊어질 지 모르는 동앗줄을 건드리기만 하면 되었다.
"휴식할 때 내몰아야 해."
최근에 그들이 연달아 축포를 올렸으므로 꼭 휴식을 취할 것이었다. 성과가 나면 크든 작든 제 몸의 편안을 쫓는 게 인간이었다. 오이카와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예정된 살해와 침착한 오이카와 중 어떤 것이 불쾌한지를 따지기엔 이와이즈미는 살아생전 대면하지 못했던 끔찍한 것들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발은 굉장히 빠르지만 지리 분별에 눈이 어둡고 쉽게 평정을 잃는 소년이었다. 그 애는 이와이즈미와의 난투 끝에 허벅다리에 검이 꽂혔다. 그 싸움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와이즈미가 겨우 이성을 가다듬을 때, 소년은 줄이 끊어진 인형마냥 비틀대다가 미리 파놓은 트랩에 떨어지고 있었다. 발악하는 손짓이 남긴 허무한 잔상을 보며 이와이즈미는 거세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이카와에게 총을 쥐여주고 자신이 근접전을 맡은 건 탁월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걸 오이카와가 했다면. 이런 상상들이 찌르고 쥐어 비틀고 내리치는 움직임에 망설임을 증발시켰다.
입술이 무딘 이 사이로 엉망으로 찢어지고 있는데도 이와이즈미는 알아채지도 못한 채 더듬더듬 걸음을 옮겼다. 한 발 두 발 다가가니 허벅지의 동맥을 제대로 끊었는지 흥건한 피 웅덩이가 보인다. 비릿한 혈향이 콧구멍을 쑤시고 들어와 폐를 끓였다. 이 광경을 간절히 원하며 급소를 지독하게 노렸는데도 토악질이 나왔다. 저대로 두면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과다출혈로 숨이 멎으리라. 그의 승리를 알리는 축포가 섬의 공기를 쩌렁쩌렁 메울 것이다. 손이 뒤늦게 벌벌 떨리는 탓에 시뻘개진 단검을 다시금 고쳐잡아야 했다. 그러면, 난…….
철컥.
그 소리는 이와이즈미의 온 감각을 찢어발기며 태어났다.
쇠와 쇠가 맞물리는 소리. 동그랗게 부딪히는 소리. 무언가를 준비하는 소리. 침을 삼키는 소리. 망설이는, 망설이는, 망설이는, 망설이지 않는, 가차 없이, 말 한마디 없이, 당연한 사실을, 예정된 사실을 부리는 마냥, 마치, 이를 원했다는 듯, 오래도록 이것만을 기다렸다는 듯. 돌아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내리깐 시선, 어디를 노려야, 한숨에, 죽일 수 있으려나?
탕!
그리고 사랑해 마지 않는 그 소리가 갈비뼈 틈을 헤집고 꿰뚫는다. 이와이즈미는 차례를 지긋지긋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
"이와쨩, 괜찮아?"
이와이즈미는 반사적으로 제 위의 그림자를 후려잡았다. 팔의 반동이 무지막지하게 가해지자 큰 덩치가 한번에 휘어 눕혀졌다. 반대쪽 손으로는 망설임 없이 목덜미를 쥐곤 죽일 듯이 졸랐다. 한번에 죽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죽임당한다. 오직 그 생각만이 관자놀이 속을 날뛰고 얄팍한 신경을 헤집어놓았다. 손아귀에서 숨통이 살기 위해 아우성을 치는 게 느껴진다. 뜨겁고, 팔딱거리는 삶 덩어리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연약한 피부의 파들거리는 사투가 가해자의 팔에 전염병처럼 옮겨갔다. 부들거리면서 사람을 죽이는 제 두 손을 본다. 그런 시야에, 본능적으로 퍼드덕대는 목울대와는 달리, 하얀 손가락이 옅게 떨리며 가만히 이와이즈미의 손에 와 닿았다. 반항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눈 깜짝할 새에 모든 혈기가 그 손에 빼앗기듯이 이와이즈미는 힘을 풀었다. 아는 손이었다. 곧이어 아는 숨결이 컥컥대며 터졌다. 한참 동안 허겁지겁 숨을 삼키곤, 아는 목소리가 천연덕스럽게 흘러나왔다.
"……이와쨩, 아침부터 꽤 적극적이네?"
희미하게 떨린다. 겨우겨우 건넨 농담이 애처롭다. 그걸 듣고 나서야 오이카와의 새빨개진 눈가나 새파래진 안색이 들어왔다. 생리적인 구명 사이에 지독하게 차분한 눈도. 모조리 다 아는 것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서서히 떨어져 오이카와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그러자 익숙한 향이 호흡기를 가득 메웠다. 오이카와가 뭐라 뭐라 말하는 게 느껴진다. 꿈틀대는 목울대에 집중하니 잘 들리지 않았다.
"악몽 꿨어?"
중간중간 그렇게도 말하는 것 같았다. 악몽. 그 단어는 고심해서 고른 것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니 그제서야 햇빛이나 커피 냄새 따위가 다가왔다. 조용히 똑딱거리는 둘이 직접 고른 벽시계와 열어둔 창가에서 살랑거리는 하이얀 커튼. 늦잠 자는 이와이즈미를 가만가만 남몰래 변호하며, 밥을 도자기그릇에 옮겨 담는 일을 한푼씩 미뤄두었을 오이카와.
너무나 따스해서 데일 것만 같은 우승자로서의 삶이.
이와이즈미는 목을 졸라도 당황하지 않는 오이카와와 살고 있었다. 마르고 퍼석한 눈가가 이 아침과 몹시 어울린다.
난파선
장을 보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권이다. 두부를 사자며 잰걸음으로 뛰쳐나가는 오이카와 뒤로 이와이즈미가 빠릿빠릿하게 카트를 몰며 뒤를 따랐다. 안 그래도 커다란 놈이 들뜨니 아주 시야가 다 시끄럽다.
"이와쨩, 이와쨩. 부침용 사야 해, 찌개용 사야 해?"
"부침용."
"아~"
낯간지럽게 뭐하는 짓이야. 발걸음을 뗀 지 얼마나 지났다고, 가판대의 두부를 종이컵에 한가득 넣어 들곤 하나를 살랑살랑 흔들며 입을 벌리는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이리 한가득 집어 오면 어떡하냐고 타박하자 억울하다는 듯 자기는 주는 걸 받아오기만 했단다. 그리곤 튀김 두부를 해주겠다며 의기양양하게 카트에 두부를 싣는다. 이와이즈미는 얼렁뚱땅한 전개에 체념한 채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
"안주는 오이카와 씨에게 맡기라고!"
"또 녹여버리려는 거냐."
"술! 술도 사 가자!"
오이카와가 부엌에 ‘소환’했던, 냄비를 채운 괴상한 기름 두부 탕을 상기시키자 손목을 팔랑대며 주류 코너로 도망가는 꼴이란……. 한 입을 냅다 삼키곤 양치를 일곱 번이나 했었지. 이와이즈미는 입속의 두부를 으적거리며 오이카와가 놓친 찬거리를 담았다. 여기 두부가 괜찮긴 괜찮네.
여러 채소, 생선, 육류를 담고, 냉동식품 코너에서 치즈스틱을 담는 오이카와를 저지하고, 떨어진 조미료와 유제품, 스포츠 드링크를 담고, 괜찮은 과일이 나왔는지 살펴보다가 베이커리의 우유 빵을 탈탈 털어오는 오이카와를 저지하면 대강 장 보기가 끝난다. 저번 주에 잡화 매장에 가서 실컷 즐겁게 바보짓을 하고, 의류 매장에서 재수 없는 자칭 패션쇼를 봐주었으니 오늘은 식재료만 사면 되었다. 카트에 담긴 소중한 식량을 헤아리며 발걸음을 옮기던 이와이즈미는 익숙한 모퉁이에서 반사적으로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저 앞에서 오이카와가 고심하며 손에 쥔 것을 내려다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는 화장품 코너에 이와이즈미와 동행하는 걸 아주 재미나게 여겼다. 처음 어리숙하게 끌려가 오이카와와 꺄르르 웃는 여직원들에게 온갖 생체 실험을 당한 이와이즈미는 바로 다음 주부터 그를 무시하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랬더니 오이카와 자식이 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어여쁜 오이카와 씨를 원한다면 가만히 기다리라고!"
안 원해. 매정하게 말하곤 어서 귀찮은 짐 덩어리를 떼어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무르게 구는 건, 오이카와가 이 순간 속에서 마음이 벅차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쨩은 못 생겨서 더 관리해야 해~ 제멋대로인 오이카와가 하얀 크림을 두 손에 묻힌 채 그의 뺨을 마구잡이로 문지르는 건 짜증 났지만, 온전히 함께 장을 보고 장난을 치고 숨을 내쉬는 평화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했다. 어쨌거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와 함께 행복에 겨운 축하주를 기꺼이 땄다.
뭐, 그래서 귀찮은 취미가 생겨버렸지만 말이다. 이와이즈미는 카트에 팔을 걸쳐놓고 뚱하니 체중을 실었다. 아로간이 어떻다느니 파라핀이 없다느니, 고운 빛깔의 디스플레이 사이에서 이와이즈미가 알아듣지 못할 열띤 토론을 벌이던 오이카와는 이내 쪼르르 다가왔다.
"이게 효과가 직빵이래."
"어디에."
"이와쨩의 한숨 나오는 다크써클에!"
이 새끼가? 손이 절로 나가 허여멀건한 볼딱지를 잡아당겼다. 아프다고 갹갹대며 버둥대는 게 꼴이 좋다. 심드렁하게 손가락을 조이다가, 문득 오이카와의 눈가를 보니 밑이 거뭇하다. 뜯어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시퍼런 기운이 올라와 있었다. 전에는 정말 백옥 같았는데……. 난장판이던 아침이 떠올랐다. 옥죄던 손아귀 탓에 목소리가 잔뜩 쉬었다. 화들짝 놀라 물을 떠 주곤, 괜찮다고 뭘 유난이냐고 말끔하게 대꾸하는 오이카와를 굳이 고집 피워서 달래 주는 순간들. 그들에겐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잔잔한 일상 틈바구니에서 가장 익숙한 일이다.
"하나 사던가."
"정말? 오이카와 씨가 매일매일 손수 발라줄게. 이와쨩도 은근 걱정하고 있었구나?"
저기에 대꾸하면, 꺅꺅대며 온 사방에 ‘우린 게이 커플이에요~’라고 안내 방송을 할 게 뻔했다.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카트에 눈짓했다. 계산대로 밀려들어 가는 게 묵직하다. 둘의 행복이 온전히 카트에 담겨 있었다. 오이카와의 키만큼 영수증을 뽑아도 사지 못할 정도로 귀중한 가치다.
뭐, 이와이즈미는 늘 걱정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오이카와 때문이다.
원체 잠이 적은 편이라, 이와이즈미가 끊임없이 잔소리해도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버릇으로 박혀 있었다. 이 ‘게임'이 시작된 뒤 둘은 번갈아 보초를 섰다. 앞선 날들에선 ‘번갈아’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이카와가 먼저 이와이즈미를 재우곤, 온순하게도 자는 이와이즈미와 바스락대는 어둠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리고 깨우길 일 분, 이 분 미루면 어느새 아침이다. 왜 안 깨웠냐는 타박에 별로 졸리지 않았다고 능청스레 답했다. 두 번이나 그런 밤이 지나자, 그다음 밤부턴 어떻게 알았는지 이와이즈미는 정해진 시간마다 저절로 눈을 부비고 일어났다. 내가 졌어. 오이카와는 혀를 내둘렀다. 정말 못 당하겠네, 이와쨩은.
“좀 더 자지~ 이와쨩 오늘 힘들었잖아."
“나만 힘들었어? 꼼수 부리지 마. 이제 네가 잘 시간이다."
이와이즈미가 단호하게 말하곤 꼼꼼하게 담요를 덮어주면 거짓말처럼 잠이 왔다. 잠자리가 우스울 정도로 포근하다. 눈을 감은 자신과 바스락대는 어둠을 번갈아 응시할 이와이즈미를 떠올려서인지도 몰랐다. 그런 모양으로 두 사람의 밤은 저물고 피어났다.
그러나, 살육이 점점 손에 익을수록 오이카와는 잠을 통 못 잤다.
베갯머리에서 그날 하루를 되짚는 건 오래된 습관이다. '그날 하루'는 수년 전부터 수 달 전까지 쭈욱 거진 다 배구였다. 이와이즈미와 호흡을 딱딱 맞추는 건 오이카와에게 늘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이와이즈미가 가장 잘 치는 네트 주변으로 공을 올리면, 묵직하게 내리꽂는 스파이크가 체육관을 울렸다. 환호성 틈에서 자랑스러움에 꽉 쥔 주먹이 심장을 울렸다. 아무 말 없이 서로가 최고라고 자부하며 손바닥을 마주치는 순간들. 그 순간들을 위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숨이 차오르게 노력했던 일과들. 이와이즈미와의 반짝이던 시간을 하루의 끝에서 꼭꼭 곱씹으면, 빠듯한 자랑스러움과 내일에 대한 설렘에 이불을 팡팡 걷어차거나 뒤집어쓰고 소리 없이 웃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어제도, 또 그제도 아니었다. 날짜를 헤아리기 두려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혀, 자랑스럽지 않아. 당연한 소리다. 함께 입을 모은 작전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 나이스 킬! 숨이 끊어진 것을 똑똑히 확인하면, 귓가에 두근거리는 감탄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배구를 하던 자신의 목소리다. 과거의 그는 멋도 모르고 블로킹을 부숴버리는 자신의 이와이즈미에게 환호한다. 오이카와는 토기와 죄악감을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의 그가 해야할 일은 피에 절어있는 이와이즈미를 으스러질 듯이 껴안아주고, 진흙을 서로에게 덕지덕지 발라주는 것이다. 피 냄새를 숨기지 않은 채로 이동하면 짐승을 다루는 이들에게 순식간에 잡힐 게 뻔했다. '개 주인'들은 근시일 내에 둘의 먹잇감이 될 예정이다. 완벽하게 짜올린 계획에 구역질이 난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고, 앞으로를 위한 개선책이 떠올랐다. 총성으로 몰아붙인 후 뒤로 빼돌리면 동선이 겹치고……내가 합류해서 일단 한놈을 죽이면……어제 손에 넣은 덫을 언덕에………그 여자의 석궁을 수습해서……그러면 이와쨩이 단숨에 숨통을.
이와이즈미는 몸으로 하는 모든 것에 쉽게 요령을 터득한다. 사람을 베고 찌르는 것에도 마찬가지다. 눈을 감으면 오늘 그를 껴안았을 때가 생각났다. 살인한 직후인데도 익숙한 몸뚱어리는 한자락도 떨리지 않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오이카와는 눈을 다시 떴다.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진 시야가 또렷하다. 무섭지 않아, 그치만, 이와쨩인걸?
"오이카와."
오이카와는 재빨리 숨을 몰아쉬곤 누워있던 몸을 돌렸다. 괜찮아 보이겠지, 뻔뻔한 연기를 자부하면서도 초조하게 걱정한다. 이와이즈미는 저만치 보초를 서던 동굴 앞에서 조용히 다가왔다. 그리곤 코앞에서 쭈그리고 앉더니 이내 몸을 누인다. 보초를 바꾸자는 제스쳐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동그랗게 의문을 내보내자, 답이라는 듯이 손바닥이 뻣뻣한 등허리를 가볍게 도닥거리기 시작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듯이, 조르면 곧 자장가라도 불러줄 것처럼, 질리도록 다정하다.
"이와쨩, 안 자?"
"너 자면 잘 거다."
"난 괜찮은데…"
"머리 굴리려면 조금이라도 자야지."
신뢰와 걱정이 버무려져 있었다. 이런 무뚝뚝하고 사랑스러운 태도는 꼭 예전하고 똑같아서, 무언가 안심되는 기분이다. 코앞을 달구는 숨결도 평생 동안 맞은 것과 똑같다. 마음만 같아선 차분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얼굴을 잡고 밤새도록 바라보고, 맘에 차도록 닿고 싶다. 그러하면 내일 밤 이와이즈미가 잠을 자지 않겠다고 똑같이 억지를 부릴까 봐 조용히 충동을 삼켰지만.
포근한 온기가 또 이와이즈미다. 오이카와는 비명과 아우성을 지르던 이들을 상념에서 밀어냈다. 그리곤 자신의 이와이즈미를 가득 담고 잠을 청했다. 하긴, 이와이즈미가 바로 곁에 있는데 뭔들 그리 다르나 싶었다.
눈꺼풀에 쌓인 햇살이 가볍다. 오랜만에 맞이한 개운한 아침이었다. 이 동굴, 적어도 오늘까진 안전하니까. 오늘은 내가 이와쨩 재워줘야지. 아침에 일어나서 떠올린 일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가능하다는 게 재앙이지만. 그 재앙 앞에, 오이카와는 잠에 들며 수도 없이 생각했던 문장을 영웅으로 당당하게 내세웠다. 어쨌든 그의 곁에는 이와이즈미가 있다. 이 생각만 해도 갈라진 가슴 틈으로 희망이 퐁퐁 샘솟았다.
꼼꼼히 짐을 싸고 트랩을 수거하는 뒷모습이 보인다. 얼른 달려가서 거들어주려고 할 때, 이와이즈미의 사냥화 뒤꿈치에서 까만 자국이 눈에 띄었다. 어제는 없던 것이다. 시꺼멓지만 눌어붙은 혈흔이라는 걸 오이카와는 똑똑히 알았다. 추론이 진행되자 눈 깜짝할 사이에 희망의 샘이 얼어붙었다.
짐승의 것일까?
차마 묻지 못했다. 다음 살해 계획을 거리낌 없이 논의하는 와중에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뒷목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분노라기엔 차분하고, 두려움이라기엔 완고하며, 원망이라기엔 상대가 너무나도 소중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괴상망측하고 펄펄 끓는 서늘한 감정이 터질 것만 같다. 오이카와는 얼른 평정을 뒤집어 썼다. 자신이 모를 때 사람을 해치는 이와이즈미라니.
그건 안 돼, 이와쨩.
오이카와는 그날부터 잠을 청할 때는 팔베개를 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웠다. 생존에 있어 치명적인 요건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와이즈미와, 한 치 양보 없이 차분하게 요구하는 오이카와가 언성을 높이며 싸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이야기가 끊겼네요. 너무나 제 취향이기 때문입니다. 책으로 길쭉하게 이어쓰고 싶어요.
급암온에 책이 나온다면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요. 메리 배드 혹은 메리 해피 엔딩 모음집으로! 책 이름은...어...'메리 배드 엔딩'....(작명고자)
정말 제 취향이라 한 권도 안 팔릴 것 같지만요....무슨 취향일까요....?
원고는... 미래의 내가 해주길 바랍니다.....그렇게 드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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