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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곧내

 

 

 

 

 

 

 

붉은 천 사이로 움튼 손가락이 고개를 숙였다. 드러날 살갗이 부끄럽다는 듯, 갈빛 머리칼은 잔뜩 발끝까지 뻗어 대마법사의 눈썹을 보듬었다. 아슬아슬하게 속눈썹과 엉키는 경우도 흔했다. 그럴 때면 뼈대가 도드라진 손가락은 머리칼을 휘게 벌리며 억지로 떨어뜨렸다. 이러해도 참지 못하는 욕구에 대마법사가 다시 고개를 숙이면, 시치미를 뚝 떼고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자잘한 인내가 쌓인 눈가가 살짝 찡그려지며 다시 애탄 손놀림이 시작되는 것이다.

 

 

프리드는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걸 자각하는지 모르는지, 지켜보는 괴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꾸만 손을 들어올렸다. 팬텀은 저 앙큼한 행위가 프리드의 새로운 습관이 될지 동전이라도 던지며 점쳐보고 싶었다. 더 좋은 선택지를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해결해줄까?”

 

 

신뢰가 흩어진 눈이 팬텀을 바라보자, 괴도는 오히려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프리드의 등 뒤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하얀 장갑에 싸인 손이 허공해서 카드를 뽑아내곤 책장 사이에 끼웠다. 괴도의 손은 활자 위를 미끄러지다가, 아까까지 프리드가 코를 파묻었던 책을 가볍게 덮었다.

 

 

“나, 잘한다고? 그 상태면 너도 불편할 텐데.”

 

 

 

 

 

 

 

 

 

 

괴도 팬텀은 즐거워보였다. 다가오는 발걸음에서 콧노래가 샘솟는 것 같았다. 의자에 앉은 프리드 앞에 선 팬텀은 엄지손가락으로 살며시 머리띠를 밀어 벗겨 옆 책상에 놓았다. 그것만으로 성에 안 차는지, 흰 로브를 양손으로 붙들고 살풋 들어올렸다.

 

 

“이거 벗자.”

 

 

아. 머리띠에 손을 댄 순간부터 시작된, 미심쩍은 눈매에서 쏘아진 물음표가 따가웠다. 여태 자기도 갑갑했긴 했나본지 그래도 선선히 팬텀의 손에서 로브를 넘겨받아 두 손으로 천을 쥐고 머리 위로 들어올린다. 꼭 맞는 로브가 얼굴을 통과하자, 하얀 이마가 드러났다가 다시 머리칼 사이로 모습을 감춘다. 옷을 벗으려 쭉 벗는 손길에 붉은 로브가 밀려 내려가, 하얀 팔뚝이 드러났다가 다시 흐르는 붉은 천 사이로 모습을 숨겼다. 감칠맛 나는 걸. 팬텀은 그리 생각하며 홱 로브를 뺏어 들곤 망설임 없이 턱턱 접었다. 얼마 전 이루어낸 자신과의 타협으로, 프리드를 움켜쥐는 생각을 제법 동요 없이 띄울 수 있었다. 그건 발전이라기보다는 둑 같은 것이다. '이 정도까지는 마음껏 탐하자'의 둑.

 

 

 

 

프리드는 아직도 심드렁한 의문을 띄우고 있었다. 팬텀은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으며 대강 접은 천을 근처 책상에 올려두곤, 어디서 들고 왔는지 모를 얇은 린넨 천을 펼쳐들었다. 그러나 늘 의도를 띈 미소가 그렇듯, 의도를 알아챈 상대에게는 효과가 없는 법이었다.

 

 

“잠깐, 이럴 필요까지 있어?”

“기분이지, 기분.”

 

 

그 '기분'이 전적으로 팬텀의 것이라는 게 불만이었나 보다. 흰 천을 목에 두른 뾰루퉁한 프리드는 꼭 유령놀이 하는 아이 꼴이라, 팬텀은 굳이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앞머리 자르는 것뿐인데 본격적이네. 프리드는 팬텀이 장갑을 벗어서 아까 접어둔 로브 위에 가지런히 두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간편하고도 멋지게 해줄 거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간 건 그 말에 혹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요즘, 그리고 갈수록 저 자신이 팬텀에게 무르게 구는 걸 알았다. 시선이 한숨동안 더 머무르고, 원하는 게 있다면 제 것이라면 선선히 빼주고 싶었다. 이 감상은 시한부 선언을 받은 이와 짝사랑하는 이가 번갈아 적어 내린 글이다. 익숙한 글씨체의 낯선 내용 덕분에 프리드의 반응은 삐죽빼죽할 수밖에 없었다. 한걸음 다가갔다가도 두 걸음을 도망쳤다. 도주는 그의 전문이 아니라 금방 잡히고 말았지만.

 

 

팬텀은 은가위를 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글 돌리며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다. 취하는 모양만은 여태 미용 견습생으로 살았던 것 같았다. 아니, 손가락을 뻗어 프리드의 턱을 가볍게 휙 올릴 수 있다면야, 제 몸에 두르는 인상은 괴도든 미용사든 잠깐이라면 상관없지만. 애써 깊게 밴 시선이 무색하게, 흔치 않은 명령은 꽤 단호하게 내려졌다.

 

 

“눈 감아.”

 

 

두어 번은 튀어오를 줄 알았던 눈길이 예상보다 순종적으로 스러지자, 정작 팬텀은 그 얼굴에 바로 손을 대지 못했다. 한 박자를 꿀꺽 집어 삼키고 손 갈퀴 사이로 앞머리를 부드럽게 흘려보낸다. 프리드가 앉아있었기에, 마른 어깨선은 눈높이보다 한참은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태연한 척은 하지만, 다 들켰어. 대마법사 양반. 짐짓 모른 척하고 어깨에 내려앉은 손이 빳빳한 직선을 톡톡 두드렸다. 이렇게 굳어있으면서.

 

긴장할 필요 없는데. 키스 기다리는 소녀도 아니고…….

 

농담을 끼운 바늘을 던졌지만 왠지 제가 꿰인 기분이라, 팬텀은 괜스레 프리드의 죄 없는 앞머리를 쓸어 올려 동그란 이마를 드러냈다. 불만 어린 색으로 한 쪽 눈이 살짝 떠졌다. 음, 역시 저 색은 꽤 좋아해. 그러나 잠을 자는 모습도 드문 '그' 프리드가, 자의로 눈을 감은 모습은 귀하단 말이지. 팬텀은 다시 눈을 감으라고 언질을 주기 보단 까쓸한 앞머리 한 움큼을 들어 올려 살짝 잘라냈다. 미끈한 쇳소리에 눈을 꼭 감는 게 느껴져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갈색 머리칼이 사각사각 떨어진다. 그 자그마한 무게가 간지러운지, 평온함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거의 처음 보다시피 한 프리드의 어색함이 재미났다. 허나 소유욕이 가미된 불순한 유쾌함이다. 긴장한 프리드를 만질 수 있는 게 자신뿐이라고 생각하자 포만감이 뱃속에서 아우성을 쳤다. 벗어나고 싶어 하는 대마법사가 꾸욱 손길을 참을 수 있는 상대가.

 

 

갈빛 부스러기가 쌓인 눈꺼풀이 마음에 걸린다는 구실을 세우고, 팬텀은 가위를 소리 없이 내려두곤 손을 올렸다. 엄지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이 속눈썹을 누가 또 만졌을까? 앞으로는? 신체 중 가장 연약한 감촉을 부드럽게 쓰다듬자니, 여신의 은빛 수사슴의 목을 손아귀에 넣고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신화 속의 사냥꾼 같았다. 금기를 깨고 내 것이란 낙인을 찍을까, 아니면 이 기회를 버리고 자비롭게 놓아줄까? 콧대와 눈두덩 사이의 작은 굴곡에서 눈의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가냘픈 살결이 바르르 떨렸다. 뺨을 쓸고, 귓바퀴 바로 밑부터 흘러내린 손길이 턱에 고였다. 아주 옅은 간격으로 손만 뻗으면 이제.

 

 

“다 됐어?”

 

 

아, 놓쳤다.

 

안도감과 아쉬움이 동시에 손끝을 휘감아서, 팬텀은 애꿎은 프리드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털어냈다. 찡그린 콧잔등이 단정하다. 괴도는 시피미를 뚝 떼며 은빛 구실을 다시 집어 들며 말했다.

 

 

"한참 멀었어."

 

 

아직 만족스럽게 훔치지 못해서 말이야.

 

 

 

 

 

 

 

 

 

 

 

 

 

 

 

=

 

그러하다

상상할 때는 매우 귀여웠는데 내가 쓰니 그러하지 않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