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법사는 먼지와 거리가 있었다.
가지고 있는 종이 중 가장 결이 좋은 것에 편지를 써내려가다가도, 머릿속 작은 모퉁이에 무언가가 사각거리며 써지면 바로 자리를 일어나 잰걸음으로 서재로 갔다. 낡아빠진 사다리가 오늘 하루도 겨우겨우 무사히 마법사의 무게를 버틸 때, 프리드는 팔을 뻗었다. 그의 서재에 꽂힌 그 순간, 프리드는 책의 위치를 외웠다. 천장에서 얼마나 가깝고, 무슨 색의 표지인지. 어떤 글씨체로 책등을 덮었는지. 대마법사는 검지로 꽂혀있는 책들의 등을 얕은 두께로 쓸었다. 제목을 찾는 행위가 아닌, 위치를 확인하는 행위였다. 손길은 망설임 없이 책들을 넘어가다가, 그러면 그렇지, 라는 듯 당연하게 한 책에 멈춰 섰다. 종이와 책장 결이 쓸리는 묘한 나무 소리가 났다.
그러니까, 아주 가까운 거리가.
책을 빼어들었으면 다음은 귀퉁이에 미세한 먼지 입자들을 내쫓아야 할 차례였다. 프리드는 딱히 질색하는 기색 없이 볼을 부풀렸다가, 후-하고 숨을 불어 잠자던 책을 깨웠다. 얼핏 들어온 햇살이 부딪혀 먼지와 함께 떨어졌다. 다음 책, 다음 책도 마찬가지의 차례를 맞았다. 프리드는 대여섯 권의 책을 양 팔뚝 위에 올려놓고. 끙, 소리를 삼키며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동료들이 직간접적으로 그 강도를 걱정하는 팔이지만, 익숙한 자세에 그리 힘겹지는 않았다. 가늠할 수 있는 무게가 친숙하다. 애초에, 책들일 뿐이기도 하고.
책의 속살을 부드럽게 짚어 내린다. 이미 자신이 원하는 부분은 알고 있어, 역시 그 손길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지식을 탐구하는 진도는 이 책과는 이미 오래 전에 나눴다. 확인하는 몸짓에 가까웠다. 제 기억이 종이결 사이에 얌전히 남아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프리드는 자신이 원하는 부분을 눈에 바듯하게 담고는, 조금은 조급한 손길로 손에 잡히는 종이 뒷면에 생각의 자취를 남겼다. 대마법사의 뇌는 그의 손을 기다려주지 않은 채 빠르게 탐구의 굴레를 그려나갔다. 처음 마법에 손을 대었을 때부터 각인된, 태초의 굶주림이었다. 오만하게 내달리는 탓에 뒤쳐지는 것들은 빠르게 휘발된다. 급한 필기체에 잉크가 몇 방울 튀었다. 생각의 행보에 작게 뚫린 온점만큼의 작은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시 다음 책. 다음 쪽, 다음 문단, 다음 문장. 잘 짜인 춤처럼 프리드는 책을 펴고 덮고 무언가를 끄적여 내려가는 일련의 동작을 되풀이했다. 목소리를 키우지 않는, 목표지점에 도달하지 않으면 멈추지 않겠다는 작은 강박증도 함께였다.
때론 책상 위의 종이가 프리드의 장단에 발을 못 맞출 때도 있었다. 급하게 책상 위를 더듬는 손길에 끌려나온 쓰다만 편지들의 뒷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건 퍽 안 좋은 습관이었는데, 이 빠른 박자의 연구가 끝난 후에 프리드는 흔치 않게 과거를 후회하며 다시 편지를 써내려가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책상위의 종이들을 모조리 소모하곤, 프리드는 다시 새로운 종이를 구하러 발걸음을 옮기는 대신, 책상 한 귀퉁이에 대강 놓인 짜리몽땅한 흰 분필을 쥐었다. 깃펜과는 다른 감촉이 그를 맞았다. 마법에 정신 팔린 마법사는 책상을 모조리 뒤엎을 심보는 아니었으므로 잰걸음으로 벽을 마주보고 섰다. 벽의 한 부분은 지난 연구의 흐릿한 자욱이 안개처럼 껴 있었다. 프리드는 그곳에 눈길도 주지 않고 팔을 뻗어 휙, 하곤 큰 원을 그렸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전히 지금의 연구가 발을 놀려 굴리고 있었다. 세심하지 못한 손짓은 오히려 파격적인데 반해, 손에 익은 원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동그랗다. 다시 원을 가로지르는 직선 두어 개와 손 가는 데로 그렸다고 하기엔 완전한 곡선 몇 개가 원을, 술식을 채운다. 프리드는 무심한 손길로 신비로운 도형 주위에 룬어를 채워 넣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왠만한 마법사도 읽을 수 없는, 프리드가 오롯이 차지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프리드는 '대마법사'라는 호칭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겸손의 울타리 안에 자연스럽게 옮겨 심었다. 타인은 가늠할 수 없는, 하지만 프리드 자신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유한 눈매에 갖힌 서슬퍼런 시선이 제 작품을 훑으며 점검한다. 얼마나 모양이 근사할 지는 그의 안중에 없었다. 마법과 마법의 연계, 그 매서운 틈을 메우고 효과적으로 연결하는 방법을 머릿속에선 빠르게 스스로와 논의되고, 토론하고, 반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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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플님과의ㅜㅜㅜ분필 잡는 프리드 썰이 너무 좋아서ㅜㅠㅜㅠ단문 연교! 천천히 퇴고 및 덧붙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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