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그와트 au 주의
영웅즈는 기숙사 반장. 하얀 마법사가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로 부임한 이후의 상황.
개암나무 밀회
한걸음.
윤이 나는 구두가 만월을 밟는다. 남빛 실크가 구두 밑창을 조용히 받든다. 다시 한 걸음. 이번엔 푸른 어둠에 뺨을 파묻은 달 조각을 짓이긴다. 하이얀 머리칼의 남자는 정갈한 표정으로 직사각형의 밤하늘 위를 천천히 걸으며 목을 비웠다. 흰 망토가 바닥을 스치며 팔락거릴 때 마다, 결투장 근처에 다닥다닥 모인 학생들의 눈동자가 따라 붙었다. 군데군데에서 터져 나오는 선망으로 가득 찬 탄식도 함께였다.
“마법사 결투는 마법사의 덕목 중 하나로써,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필수적인 능력입니다. 여덟 학기 동안 여러분은 다양한 대(代) 마법사 방어 주문을 배웠고, 일부 학생들은 흡족한 결과를 내주었습니다. 단지 실전에서 여러분이 적과 마주할 때,”
하얀 마법사는 부드럽게 좌중을 훑었다. 그러나 교수를 주시하던 네 기숙사의 반장들은 그의 시선에 가슴팍에 달린 반장 뱃지가 타오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내색하면 안 돼. 다섯 명의 젊은 마법사는 펄떡거리는 동요의 목줄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얼마나 적절히 대응할 지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슬리데린 반장 뱃지를 단 한 사람은 달랐다. 끓어오르는 목마른 적의를 순종적인 눈빛으로 포장하기 싫었다. 슬리데린은 현명하고 교활하지. 멋도 모르는 멍청이인 척 해봐야 당신은 이미 내가 누군지 알잖아?
“오늘 여러분은 마법부령 정식 규격인 이 피스트 위에서 실전 연습을 할 겁니다. 우선 시범을 보일 학생은.”
속으로 짓이기던 저주에 화답하듯, 하얀 마법사의 푸른 눈동자가 슬리데린 학생들 틈을 꿰뚫었다.
“팬텀. 도와주시겠습니까?”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선선히 어깨를 으쓱이는 모양이 오기만을 품고 있었다. 무구한 다른 학생들이 볼 때는 빗자루 위에서 묘기를 부릴 때와 같이 제 잘남을 뽐내는 것 같았지만. 팬텀은 가볍고 화려한 몸짓으로 피스트에 올랐다. 수십 번 연습한 배우 같은 폼을 무심하게 보던 교수는 차분하지만 공간을 온전히 지배하는 그 목소리를 내었다.
“같이 싸울 학생을 지목해주십시오.”
흠? 의외의 답을 들었다는 듯 팬텀은 허리께에 손을 올려놓은 채 고개를 살짝 꺾었다. ‘같이 싸울 학생’을 들은 직후부터 학생들은 두리번거리면서 레번클로의 반장 루미너스를 찾았다. 둘은 딱히 결투 피스트 위가 아니더라도 온갖 곳에서 서로에게 주문을 쏘아댔기 때문이다. 그들이 반장이 된 이유가 막대한 벌점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러나 팬텀은 루미너스에게 약 올리는 윙크를 하던 여느 때와는 달리 하얀 마법사를 보며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웃는 눈은 아니었다.
그래, 당신이 두는 수를 따라주지.
속으로 대사를 읊곤, 어느 위치에 있는 지 정확히 안 다는 듯 좌중을 훑지도 않은 채 오른쪽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초록 무리에서도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팬텀과는 달리, 붉은 물결과 무난한 조화를 이루는 평범한 브루넷이 표적이었다.
“프리드!”
팬텀은 달밤 테라스에 나온 상대역을 향하듯 낭랑하게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관객에게 박수를 요청하는 손짓이었다. 어리둥절한 저학년들이 그 자태에 휘말려 손뼉을 쳤다. 짝짝짝―. 우미한 촌극 속에서 푸른 눈동자가 저를 향한 미소를 바라보자, 무대를 만든 장본인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맵시 있게 허리를 숙였다. 무도회에서 춤을 권하는 동작이었다.
슬리데린이 그리핀도르를 불러냈어! 시선이 섞이길 두어 초, 속삭임이 겹친 소란 속에서 프리드는 담담하게 발걸음을 뗐다. 몇 십 명의 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평소대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마치 칠판을 지워달라는 부탁을 받은 듯 태연했다. 프리드는 한걸음을 남겨두고 중앙에서 팬텀과 마주했다.
두 반장이 결투에 참가하다니, 이번 만찬의 메인 디쉬가 정해졌군.
휘익-! 두 지팡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둘은 검을 대련하는 기사처럼 지팡이를 코 바로 앞에 수직으로 세웠다. 성냥에 붙은 불이 훅 꺼진 것처럼 공기가 빠르게 식었다. 아까까지 다정했던 마법사가 주도하는 얼어붙은 분위기에, 팬텀은 곁눈질로 교수를 주시하기를 그만두고 혀를 내둘렀다.
“이런, 화났어?”
“조금.”
“야단났네.”
다시 채찍질 하듯 지팡이를 아래쪽으로 빼들고, 두 마법사는 서로에게 경례했다. 정통적인 마법사 결투 인사였다. 팬텀은 연극 속 기사처럼 절도 있고 유연하게 뒤를 돌았고, 프리드는 로브 자락이 스치는 소리도 내지 않으며 빠르게 방향을 틀었다.
한걸음.
넌, 특정 상황에선 너무 정직해서 곤란해. 프리드는 활활 타오르던 자주색 눈의 잔상을 지우려고 애를 썼다. 그가 몇 번 저지르지 않는 헛된 수고였다.
두 걸음.
이 멍청이가! 다리도 다 안 나았으면서. 어제 입은 상흔을 달고 절뚝거리지 않은 게 용했다. 요정처럼 가뿐히 뛰어오르던 발자취가 눈앞의 남빛 피스트에 찍혀 있었다. 아픈 기색 없이 감쪽같았지만, 다 보여. 병동도 제대로 못 가는 주제에 말이야. 한 사람에 대한 온전한 걱정으로 초조함이 뱃속을 채웠다.
세 걸음.
-라고 프리드는 책망하고 있겠지. 팬텀은 어젯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떠올렸다. 걱정과 자책감이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자신에겐 어여쁜 기억이라는 사실에 자조적인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지켜보는 눈이 있어 일부러 혹독하게 할 테니, 우선은 방어주문을 외쳐야겠군. 팬텀은 여유롭게 공략을 갈무리했다. ‘그’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만큼은 아니더라도, 이기려 발악을 해도 아슬아슬한 까다로운 상대다. 여긴 적당히 하고, 문제는 다른 쪽이군.
네 걸음.
함께 싸울 사람이라고? 우습지도 않아. 내가 겁에 질려 당신을 두려워하길 바랐나?
다섯 걸음.
다시 휙 뒤돌아 서로를 응시한다. 두 손에 쥔 두 지팡이는, 이제 요술을 부리는 도구가 아닌 상대를 가차 없이 공격할 무기가 되었다. 원한다면 보여주지. 시선은 제게 끌려나온 동료에게 가있었지만, 팬텀은 자신의 적을 보고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 얼굴을 메마르게 관찰하던 하얀 마법사가 또박또박 읊었다.
“원, 투, 쓰리.”
똑똑히 보라고. 팬텀은 이를 악물었다. 주문을 외치는 목소리가 얽히며 흰 불꽃이 튀었다.
“다리 올려봐.”
“오늘따라 적극적인데, 프리드?”
팬텀이 수풀 밑 밀회인 것 마냥 유혹적으로 속삭였다. 프리드는 그를 무시한 채 팬텀의 발목을 들어 올려 제 허벅지 위에 두었다. 팬텀은 눈을 내리깐 채 자잘하게 움직이는 정수리를 보았다. 한쪽 무릎만 꿇은 프리드의 어깨가 말랐다. 고통을 참는 꽉 말아 쥔 주먹이라도 보았는지, 머트랩 용액을 적신 천으로 종아리를 닦아내는 손길은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회복약이 발효되려면 아직 3일은 남았어. 그때까지 이거로 버텨야만 해.”
“아하.”
“괜찮아?”
“키스해주면 괜찮을 것 같아.”
“괜찮나보네.”
프리드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마음 속은 걱정이 치밀어올라 상처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게 사실이었지만. 북쪽 교사 2층 복도 끝에 위치한 교수의 방에 침입했던 지난밤이 사고를 찢는다.
재빨리 새장 속 부엉이의 기억을 뽑아서 탈출하려할 때, 마법이 걸린 덫에 팬텀이 물렸다. 탈취하려는 것과 상응하는 대가, 침입자의 피를 받아내는 마법 기구였다. 팬텀이 고통의 찬 신음을 억누를 때, 프리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팬텀을 부축한 채 혈흔을 지우고 경비 마법의 기록을 엉켜놓은 것뿐이었다. 들킬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프리드가 상처를 닦다 말고 팬텀 발목의 푸른 멍에 지팡이를 가져다 대자, 색이 순식간에 옅어졌다. 이번 것은 결투 수업에서 자신이 남긴 것이다. 그는 팬텀을 지목했다. 그리고 팬텀에게 지목을 권했다……. 프리드는 아주 오래된 용의자였다. 이는 당연했지만, 그 선상에 팬텀도 함께 오른 것이 참담한 기분을 빚었다. 무리해서라도 혼자 가야 했나.
팬텀은 자신을 일곱 번이나 내동댕이친-심지어 각각 다른 공격마법으로!― 프리드의 가혹함에 대해 투덜대다가, 프리드가 생각에 빠져 하나도 듣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손가락을 뻗어 미간을 톡톡 두드렸다.
“미안, 도발에 넘어갔어.”
프리드는 흠칫, 생각의 우물에서 몸을 꺼내며 고개를 들어 팬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얼굴이 건조해보였다. 자신도 비슷한 모양이리라.
“알면 됐어.”
루미너스나 다른 학생들을 지목했다면 그것도 문제였을 테지. 한숨 한 자락이 목구멍 뒤편으로 녹아내렸다.
하얀 마법사의 의혹을 파헤치려 차근차근 진행되던 계획이 작년 겨울부터 온갖 위험부담을 껴안은 채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퍽 순조로웠다. 비록……. 프리드는 다시 근심스러운 눈길로 팬텀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끔찍하게 찢긴 팬텀의 다리를 보고 평정심을 갖기란 쉽지 않았다. 맨드레이크를 고아놨으니 그거로 될 거다. 다행히 증세는 아는 것이었다. 온갖 모르는 기구들로 채워져 있던 방에서, 공략 방법을 아는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슬리데린의 운은 내가 관장한다고? 능청스럽게 말하던 얼굴을 마주하니 조금은 평정이 돌아왔다.
“그래도 어제 일이 성공해서 호그스미드 주말에 다음 전략을 짤 수 있겠어.”
“그거 좋네. ‘팀 레번클로’도 성공했나봐?”
“그래. 초상화를 무사히 따돌려서 다행이야…….”
프리드가 다시 생각에 잠긴 채 천에 지팡이를 가져다 대자, 묻어있던 피와 고름이 빨려 들어갔다. 이쯤하면 되겠지. 페룰라. 속으로 읊조리자 둘둘 말린 흰 붕대가 나타나 상처를 단단하게 묶었다. 붕대가 잘 묶이는 지 지켜보던 프리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제 일은 너무 조급하게 생각했어. 좀 더 조사했으면 다칠 일은 없었을…”
“프리드.”
자책하는 목소리를 냉담하게 끊는다.
“가장 조급하게 구는 건 나야. 네 탓이 아니고, 내 탓이라고.”
프리드는 침묵한 채 시선으로 사실의 배를 갈랐다. 팬텀이나 스스로에게 질타와 원망의 검을 찔러 넣고 싶지만 방향도 근거도 알 수 없었다. 그 눈길을 끌어안고 싶은지 밀어내고 싶은 지 팬텀 역시 알 수 없어서, 고개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춤으로 팬텀은 선택을 미뤘다. 그가 여민 그림자를 피하듯이 프리드는 눈을 감았다가, 팬텀 물러나자 다시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이건 우리 대마법사님이 말끔하게 치료해 주실 테니.”
“빗자루는 어떻게 타려고.”
“쉬잇. 난 두 다리 부러져도 날아오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팬텀은 평소처럼 프리드가 어쩔 수없이 마주 웃을 때를 기다리며, 산드러지게 미소 지으며 프리드와 눈을 맞췄다. 그러나 프리드는 따라 미소 짓지 않았다. 역시 까다롭다니까, 너는. 팬텀은 그만 삐죽 백기를 내건 채 말을 돌렸다.
“그런데, 우리 대마법사님은 어떻게 내가 있는 문을 여셨을까?”
씩 웃는 모양새가 얄밉다.
“응? 내가 무얼 필요로 하는 줄 알고?”
프리드는 가만히 눈길을 돌렸다. 팬텀은 흥이 돋구어져 그를 쫓아 뒷덜미를 덥석 물으려다가, 빠르게 겨냥된 한마디에 순간 굳었다.
“나잖아?”
“……하?”
프리드는 오히려 태연했다. 교수님의 질문에 대답하고 ‘잘했다 프리드, 그리핀도르 10점.’이라는 대사를 들은 것 마냥. 이것 봐라? 팬텀은 눈썹 끝을 쑥 밀어올린 채 삐딱한 미소를 짓는 것을 무시한 채, 프리드는 팬텀의 바지자락을 내려 갈무리를 해주곤 대화를 닫았다.
“늦었으니까 돌아가. 내일 퀴디치 시합 있지?”
지금, 돌아가라고? 이 상태로? 팬텀은 억지로 대화의 문고리를 돌렸다.
“승리의 키스를 해주면 가뿐히 이길 텐데.”
“내일 그리핀도르랑 시합하는 건 알지?”
문이 닫혔다. 프리드는 참았던 한숨을 몰아쉬었다.
필치와 노리스 부인이 학교를 휘저을 시간까지도 둘은 투닥투닥 숨을 나누다가, 결국엔 프리드의 반협박으로 겨우 팬텀이 먼저 기숙사로 출발했다. 7층 복도에서 지하 기숙사까지 들키지 않고 가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 어렵지만, 혀를 놀리는 솜씨로 별을 따오는 팬텀이라면 알아서 잘 갔을 터다. 프리드는 뒤편에 위치한 서가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자신만을 위한 방. 책들이 빼곡한 책장과 따듯하게 피어오르는 벽난로. 사방이 그의 취향으로 버무려져 있었지만, 사실 프리드의 필요의 방은 간단한 조건만 충족하면 되었다. 완벽하게 혼자가 되는 공간.
빈방에서 프리드는 두 손바닥 사이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쥐고 있던 천 조각 때문에 머트랩 용액의 시큼한 냄새가 났다. 온갖 맛이 나는 젤리를 한주먹 삼킨 것 같이 색이 다른 감정들이 저들끼리 손을 맞잡고 정신없게 춤을 추었다. 그 중 가장 목소리가 큰 책임감이 육중한 군무를 추기 시작하자, 부담감이 토기와 함께 올라왔다. 어떤 수를 둬도 지는 체스 판이 눈앞에 있었다. 이길 확률은 정말이지 거대 오징어의 몸집 중 눈깔이 차지하는 비중처럼 적었다. 얼핏 보면 그들의 행보는 순조로웠지만, 그 남자가 이리 쉽게 길을 내어주진 않았을 터다. 앞으로 또 무엇을 대가로 주어야 할 지 감도 잡히지, 아니,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제 진단을 부정한다. 아니야, 우리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지.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러나 갈 길은 아득하게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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