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론 쉐르픽 감독의 영화 <<One Day>>에서 형식을 따온 것임을 밝힙니다. 내용을 모르셔도 감상에 지장은 없습니다. 꽤 볼만한 영화에요. 추천추천!
가볍게! 아주 가볍게!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가볍게! 쓰는 중단편. 서너개로 끊어 쓸 예정~
과거 미래 날조 주의. 취향 타는 요소 주의.
ONE DAY
1999. 7. 14.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루를 정해서, 그 하루는 꼭 둘이 같이 보내는 거야. 그걸 매년 하다 보면 일 년에 특별한 날이 하나 더 생기는 거지!
오이카와 토오루의 쪼그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말보다 지저귐 같다. 이와이즈미는 막연하게 그리 생각했다. 길 가 참새의 ‘짹짹짹’ 같아. 물론 이 ‘쫑알쫑알’은 그보다는 더 희귀한 것이었다. 오롯이 이와이즈미에게만 쏟아졌으니. 하나같이 말 같지가 않은 것도 이유다.
그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을 매일 만나는 게 더 좋지 않냐.
순간 납득당한 듯, 눈이 커지며 드러난 갈색 눈동자가 동그랗다. 그러나 언제 그랬다는 듯이 고개가 붕붕 이리저리 돌아갔다. 아니야, 그런 거랑 달라! 이건 특, 별, 한, 날이라구! 아, 그러냐. 여자아이들에게 무엇을 듣고 온 지는 몰라도, 쨍알대는 소꿉친구는 무진장 성가시다. 어서 어제 봐둔 매미를 잡으러 가야 하는데. 그게 첫 번째일 게 분명한데. 발바닥이 어서 달려가고 싶어 달아오르는 와중에도, 이와이즈미는 참을성 있게 오이카와를 기다려주었다.
그래서 뭘 하고 싶다는 거야.
특별함을 토로하던 입술은 한마디에 딱 다물어졌다. 손가락이 꼬물대며 서로를 얽었다. 바닥을 헤매다가 찔끔찔끔 자기보다 위에 있는 이에게 눈을 마주쳐 오는 것이, 영락없이 ‘이와이즈미가 꺼려하는 걸 하자고 할 때’의 수줍은 토오루다.
하지메쨩, 우리도 하루 만들자!
눈치만 살살 보다가 당돌하게 토해내는 건 ‘이와이즈미가 결국 들어줄 걸 알 때’의 건방진 토오루고. 이와이즈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끄집어 올렸다. 어차피 매일 볼 것을 무슨 그런 성가신 걸 만들어.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려 하니 기대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다. 뭐, 매일 볼 거니까 하루쯤 토오루가 들뜨는 건 별로 문제가 안되겠지?
그래.
와아! 하지메쨩 최고야! 언제로 할까? 응?
내일로 하던가.
에~ 성의 없어!
원래 아무 것도 아닌 날로 해야 하잖아.
그런가? 오이카와는 갸웃거리다가 금방 그 날짜를 마음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토오루 씨 생일이 있는 달이고, 여름이니까 아이스도 같이 잔뜩 먹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하지메쨩이 직접 정해준 날짜고! 그래, 그러자 하지메쨩! 금세 신이 나서 고개를 붕붕 끄덕인다.
꼭 달력에 표시해야 해! 내일이야! 열댓 번도 더 이와이즈미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집에 온 오이카와는 집안을 우당탕 달려다니며 빨간 색연필부터 찾았다. 키가 간신히 닿을락 말락 하는 달력에 커다랗게, 아주 크게! 표시를 해놓고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씩 웃었다. 내일은 특별한 날. 세상 사람들에겐 아무 날도 아니지만, 생일이나 기념일도 아니지만, 오이카와는 그저 자그마한 약속 때문에 설레어 이불 속에서 발을 굴렀다. 특별한 날에 무슨 이름을 붙일지 고민하던 오이카와는 깜빡 잠에 들었다. 하긴, 매미를 잡겠다고 동네를 쏘다니던 친구를 따라다니느라 엄청나게 지친 상태였다.
2009. 7. 15
현재는 제125대 천황인 아카히토가 황위에 있으며... 시원시원한 활자가 종이에 들어찬다. 이와이즈미는 운동부치곤 썩 성실하게 공부를 하고 있었다. 곧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평소보다 더 배구에 전념을 해야 하고, 악영향을 주지 않으려면 학업은 미리미리 마무리 지어 놓는 게 편했다. 이와이즈미의 오늘은 묘하게 잔잔했다. 폭풍을 몰고 다니는 원흉이 때이른 가족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삼일이라니 너무 길어!
방학엔 연습 때문에 못 가잖아. 투정 부리지 말고 다녀와라.
너무해, 이와쨩은 오이카와 씨가 보고 싶지도 않나요?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니, 대답을 하긴 했나? 그냥 등짝만 휘갈긴 것 같기도 하다. 너무 세게 때렸나. 이와이즈미는 어느 새 멎은 펜의 끝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럴 거면, 그때…….
벨 소리가 울린다. 퍼뜩 상념에서 나와 휴대폰을 살피니, 상념의 주인공이 훌쩍 따라나와 화면을 메우고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다른 이들과 같이 정직한 풀네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이름을 보고서야 오이카와가 약속을 지킨다는 걸 깨달았다. 십 년간 한순간도 떨어져서 보내지 않았던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이와쨩, 안녕! 뭐하고 있었어? 어떻게 전화가 하나도 없을 수 있어?
쫑알쫑알 시끄럽다. 너야말로 여행 잘 가서 웬 전화야?
웬 전화긴! 며칠 만인데 너무해! 알았다, 오이카와 씨 생각하고 있었지?
실상 쫑알대는 그 목소리보다 전화기 건너편이 아주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축제도 간다고 했는데 아마 지금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와이즈미는 나풀대는 목소리가 왜인지 고막에 얌전히 들어오는 게 당연했다. 언제부터인가 더욱 심해진, 연인인 것마냥 일부러 아양 떠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당사자인 이와이즈미는 그게 연인의 모양인 것도 알지 못했지만.
이와이즈미는 어쩐지 눈을 감고 싶었다.
그래.
수어초의 침묵 대신, 펑, 빛이 터지는 소리가 건너편을 메운다. 새까만 암흑 속에서 가만가만 숨소리를 더듬으며 차분하게 생각을 놓는다. 불꽃놀이 때문에 전화한 거구나. 오늘을 함께하지 못한 게 아쉬워 괜히 전화하며 밤하늘을 보고 싶었겠지. 이와이즈미는 문득 하늘에서 모습을 감췄을 그 색이 궁금했다. 오이카와가 그 광경을 보고 있을지도.
2010. 7.15.
애석하게도, 이와이즈미의 사물함에 편지가 꽂힌 것은 드문 일이다. 그 사실을 오이카와에게 들키지 않고 봉투를 여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희박한 확률을 뚫고서도, 편지 겉봉을 뜯는 손길에는 설렘 한자락 없었다. 최근 돌았던 본능적인 감이 또렷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상대로 러브레터는 아니었다. 발신인은 사물함에 몰래 두고 떠나는 수줍은 행동과는 달리, 편지 속에서 예의 바르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용건을 말하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글씨보다도, 지운 기색 하나 없이 꾹꾹 눌러쓴 편지지의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썼다 지운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수십 장을 샀으리라.
신상을 밝히지 않아서 사과로 시작한 편지는 허가에 대한 요청으로 마무리 짓고 있었다. 연습이나 경기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오이카와에게 앞으로도 손수 만든 초콜릿이나 케이크 따위를 선물해도 되는지. 경기장에 응원을 가도 되는지. 그리고 오이카와를 계속 마음에 두어도 되는지. 터무니없는 물음으로 비칠 만한 것들이다. 본인도 아니고, 그의 친구 중 하나에게 건넬 법한 것은 아니었다. 발신인은 달리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웃음을 터뜨리는 오이카와 군에게 반했어요. 그러나 그 웃음은 이와이즈미 군과 같이 있을 때만 나온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그 이후로 제가 잘못을 저지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와이즈미는 가만히 이 부분을 들여다봤다. 벌써 수십 번도 넘게 읽은 문장이었다. 수십 번도 더 편지를 찢어 버리려고 했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샘솟았다. 그제야 이와이즈미는, 이 감각이 ‘잘못을 저지르는 듯한 느낌’이라는 걸 깨달았다. 제 안을 채우는 감각처럼, 편지는 자그맣게 구길 수조차 없었다. 그저 사물함 속에 있던 모양대로 만들어 책 사이에 끼웠다. 어쩔 셈이지. 서랍에 보관이라도 할 셈인가? 제기랄, 나는…….
그쪽은 부당한 권리를 나에게 줬어요. 그건 사실 한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권리죠.
그럼에도 영영 머릿속을 나가지 않았다. 그 웃음. 이 사람은 오이카와의 진짜 웃음을 안다. 온몸을 타고 흘렀던 긴장이 순간 흩어지며 고개가 뚝 떨어졌다. 이와이즈미는 조용히 인정했다. 그는 괴상한 맥락에서 질투를 하고 있다. 옳지 않은 방향이다. 절대로 향하면 안될……. 한숨은 뱉을 수도 없게 목구멍에 끈덕지게 엉겨 붙었다.
하필 오늘. 어쩔 도리 없이 이기적인 생각이 날짜를 헤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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