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이따 봐 이와쨩!" "오냐." 지극히 일상적인 광경을 뒤로 하고, 이와이즈미는 깔끔하게 제 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때, 여느 때와 다른 작은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참아야 해. 마음 속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가 속삭인다. 그러나 고개는 미련할 정도로 가벼웠다. 고개를 틀자 등 뒤에선 오이카와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진작에 작별인사를 건낸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탕 훔쳐 먹다 걸린 어린 아이처럼 움찔 굳은 게 우스웠다. 뭐냐, 또 시비 걸 거라도 있나. 이와이즈미의 눈썹이 비죽 솟았다. 평소라면 팔을 흔들며 열 받을 만할 말들을 외치거나 한순간에 다가와 머리를 헝클이며 장난을 걸었어야 했는데, 오이카와는 미동도 없었다. 들켜버렸다는 내색을 숨기지도 못하면서, 그저 빤히 이와이즈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그 기간이냐. 사실 시비라던가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고개 돌리기 이전부터 알았다. 이와이즈미는 무심하게 눈길을 돌려 원래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굣길 아침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발자국들이 복도 가득 소란스러웠지만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여우비 예보
삼 년 간 시멘트가 닳도록 오고 다닌 부실이라 눈 감고도 가기 쉬웠다. 체육관을 잠그고 온 이와이즈미가 그 사실을 시험해보려고 해도, 눈을 감을 새도 없이 문 한 짝 저편은 바로 여기라는 듯이 시끄러웠다. 나풀대는 목소리와 1학년들의 순진해빠진 감탄. 아, 또 성가시겠네. 집에 확 가고 싶다. 이와이즈미는 앞으로의 일에 대한 귀찮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 문을 열자 목소리가 우다다 튀어나왔다. "그 아키노 상의 러브레터라니!" "야, 오이카와 너 계 탔네." "오이카와 상의 매력이 너무나 큰 걸 어쩌겠어. 어떡하지, 오이카와 씨를 차지하려고 사토쨩이랑 싸우면?"
"이런 모습 보면 금방 물릴 텐데……." 신발장이 정석이지만 부실로 오는 러브레터도 적지 않은데, 질리지도 않은지 다들 호들갑이다. 뭐 발신인이 다른 학교에서 미인으로 소문난 여학생이기 때문이지만, 이와이즈미는 딱히 그런 추론을 할 정도로 섬세하지 못했다. 다만 눈물을 찍어내는 척을 하다가 팔을 벌린 채 재수 없게 도리질 치는 모습이 제일 가관일 뿐이다. "어, 이와이즈미 상 오셨습니까!" "그래. 정리 다했으면 어서 집에나 가라." 네! 호들갑과 노가리는 일찍이 다 깠는지 우르르 몰려나간다. 타박타박 겹치는 걸음이 기특해서 피식 웃었다. 부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질투 나서 그러는 거냐고, 이와쨩은 이런 거 공감 못하니까 제가 봐주겠다고, 평소라면 이런 식의 종알거림이 뒤따라 붙어야 할 텐데. 미심쩍음에 고개를 돌리자 오이카와가 방금 전까진 음하하하 웃으며 자랑하던 러브레터를 가방 밑바닥에 쑤셔 넣고 있었다. "야." 부름에 움찔거리기까지. 오이카와, 너. 역시나 평소와 다른 모습에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고 싶었으나 참았다. 한 대 시원하게 때려주려고 했던 손이 버석거렸다. 아침의 연장선인가. 러브레터 받았으니 이미 그쳤을 줄 알았는데. "짐 다 쌌으면 가자. 쓸데없이 꾸물대지 말고." 이와이즈미의 태도는 반나절 전과 여전했다. 무심한 어투로 오이카와의 섬세한 감상을 가차 없이 자르기. 오이카와는 적반하장으로 억울하다는 듯 한 눈길로 뺨을 쿡쿡 찔렀으나 결국 이와이즈미의 뒤를 따르고 옆을 꿰찼다. 대화와 침묵이 걸음 위를 엇갈렸다. 오이카와는 언제나처럼 쫑알쫑알 대다가도 침묵을 디뎠고, 다시 가벼운 말을 꺼냈다. 이와이즈미는 설렁설렁 언질을 물어주다가도, 침묵이 찾아오면 굳이 말을 꺼내지 않고 덤덤하게 물음을 떠올렸다. 이번 기간은 언제 끝날까? 오이카와 토오루의 제멋대로 그 기간. 주기라고 할 것도 없이, 정말 순전히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휘두르는 그 기간. 제 안의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것들만 끌어 모아 빚은 천진한 미소. 동시에 목마른 시선의 끝. 닿을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벌어지는 거리. 눈 깜짝할 순간 동안만 얼어붙은 호흡. '오이카와의 이런 것들'은 여우비 같이 예측 없이 쏟아내려 이와이즈미를 휩쓸다가도, 시치미를 뚝 떼고 순식간에 그쳤다. 차마 손을 잡지 못하곤 이와이즈미의 체육복 상의 소매 끝을 잡으며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을 요구하면, 이와이즈미는 가만히 버텼다. 흔한 한마디 없이 꾸욱 눈길로 '오이카와의 이런 것들'을 눌렀다. 그리하면 그 순진하고 간사한 감상들은 왈칵 넘쳐 흐르려다가도 유리알 같이 옅은 눈동자에 우겨넣어졌다. 그럼 먼저 시선을 돌리는 건 오이카와였다. 이와이즈미는 조급해하지 않고 늘어난 소매가 점점 줄어들어 원상태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가랑비에 옅게 젖은 옷을 말리는 것처럼 얕은 기다림이었다. 며칠 뒤면 오이카와는 다시 얄밉고 가벼운 소꿉친구로 돌아와 새로 사귄 여자친구와의 데이트에 대해 종알거리며 이와이즈미를 약올린다. 아, 이건 얼마나 어설프고 견고한 평형인지. 물론 덜 여물고 어리숙할 때는 그 여우비에 지금으로써는 못 봐줄 정도로 쉽게 감기에 걸렸다. 이와쨩. 작은 호칭에 실린 꽉 찬 애정은 이와이즈미의 숨을 달콤하게 조르고, 밤이면 열이 되어 잠자리를 괴롭혔다. 다시 오이카와가 시치미를 뚝 떼고 친구 노릇만 하면 열불이 올라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던 적도 여럿이다. 변덕이 쌓여도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 곁에 머물렀다. 가까운 거리는 마음을 무디게 만들고, 제 것이라도, 온전히 제 것이라도 스치는 시간 속에 흘려보낼 수 있게 만들었다. 상념에 젖은 뺨을 탓하듯 물방울이 떨어졌다. 뭐야? 아까까진 맑더니만. 하여튼 오늘은 날씨까지 얄궂게 오이카와 같다. 그림자를 집어삼킨 구름이 빠른 속도로 둘의 머리 위로 밀려들었다. 축축한 습기가 뭉치더니 쏴아아-하고 어느새 비가 쏟아져 내렸다. 가차 없이 지면을 빗줄기가 때리는 와중에 촌동네 길은 양옆을 살펴봐도 넓은 논만이 펼쳐져 있어, 이와이즈미는 가방으로 덧없게 머리를 감싸기를 포기했다. “으아앗, 이와쨩! 비 와!” 대신 쓸모없게 쫑알대는 골칫덩이의 팔을 끌고 뛰었다. 익숙한 길이 귓가를 스치며 사선으로 내리는 비에 휘며 스러진다. 젖은 공기가 호흡기를 메웠고 달리는 걸음은 하염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제 옆을 따라 달리는 걸음소리가 요란한 빗소리를 헤친다. 헉, 허억, 헉. 겨우 버스 정류장에 달려들어 무릎을 움켜잡고 허리를 굽히며 아껴 쉬었던 숨을 벌컥 들이마셨다. “하여튼, 헉, 꾸물거리지?!” “헥, 이와쨩, 겨우 이거 가지고, 숨 몰아쉬면서, 헥, 용케 매일 오이카와 씨 때리고, 헥, 으익!” 헥헥 대는 주제에 이와이즈미 놀리기라는 본분에는 또 충실하는 모습이 같잖아서 한 대 쳤더니 앓는 소리를 한다. 실상 달리기 자체보다는 젖은 옷과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숨을 잡아먹었다. 아무리 갑작스럽게 쏟아져 내리는 비여도, 둘 모두 우스울 정도로 요령이 없었다. 조금 더 생각하면, 학교 쪽으로 되돌아가면 피할 상가 몇 개가 있었을 터였는데. 사내 놈 팔 한 짝을 챙겨 달리느라 그런 이성적인 생각은 모조리 휘발되어 버렸다. 일단 비도 안 맞겠다, 바보 같은 제 모습이 서서히 자각되니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다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누가 먼저 할 거 없이 킥킥 대며 어이없는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젖힌 시선 끝에선 갈색 머리칼이 젖어 귓가에 달라붙어 어지러져 있었다. 가느다란 굴곡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이와이즈미는 훔쳐보다가,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오이카와의 그 기간에 풋내 나는 중학생 때처럼 동화되는 것 같았다. 겨우 이런 자그마한 해프닝으로, 방금 전까지는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평형이 무너져 내린다. 이번엔 한숨을 참기가 힘들다. “으엑, 속옷까지 다 젖은 것 같아.” “너 꼭 집에 가서 다시 씻어.” “네, 네~” “또 대강 대답하고 넘기지.” “하지만 너무 추워서 아무 생각도 안 드는 걸!” 이와이즈미는 숨을 고쳐 잡은 채 심드렁하게 쳐다보다가, 오이카와의 목 끝까지 올라간 지퍼를 주욱 내렸다. 춥다느니 변태라느니 칭얼대는 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곤 벗기는 손길이 우악스럽다. 그리곤 가방에서 마른 교복 상의를 꺼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손끝에 스치는 시린 어깨가 내심 걱정되었다. “소나기야. 금방 그칠테니 그거나 덮고 있어라.” 어서 그쳐야 할 텐데. 플라스틱 지붕 밖으로 손을 내밀어 하늘을 살피는 이와이즈미를 보고 오이카와는 일순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혀를 움직였다. 그 작은 움직임을, 오이카와의 집과 여기의 거리를 가늠하던 이와이즈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와쨩, L은 키 큰 오이카와 씨한테는 너무 작은데-.” “빗속에서 맞고 싶다고?” “그리고,” 어느새 성큼 다가온 온기는 코앞에서 스스로를 달구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호흡이 데인 듯이 조용히 숨을 죽였다. 이를 아는 지 모르는 지, 오이카와는 장난스럽게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낭패다. 젖은 속눈썹 아래 동그란 눈동자에서 자기 자신을 마주한 이와이즈미는 속으로 짓씹었다. “금방은 안 그칠걸? 이와쨩 기상일보 안 봤구나?” 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변덕스러운 무언가 때문인지 꼭 닿은 오이카와는 떨리고 있었다. 맞닿은 뺨을 흐르는 빗물이 너무 차가웠다. 뭐가 그리 설레는지 온통 붉히도록 그 뺨이 뜨거워서였다. "그러니까 조금만 이러고 있자." 제발. 어느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와이즈미는 말꼬리에 붙은 소리 없는 애원을 못 들은 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빗소리가 거세고 몸은 뻣뻣했다. 이와이즈미는 이 모든 것들에 예보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럼 질리도록 익숙한 등을 감싸며 미세하게 떨리는 제 손을 미리 참아낼 수 있을텐데, 하고. = 손풀기 오이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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