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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 http://totomorrow.tistory.com/31
비는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한두 방울 떨어질 때는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며칠 째 어두침침하다. 오이카와는 아빠다리를 한 채 책상 앞에서 팔을 포개고 있었다. 지겹게도 내리네. 포갠 팔에 고개를 파묻고 창밖을 떠올린다. 지독한 장마에 꽃잎이 죄다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곧 빗물이 세차게 흐르면, 그 물줄기에 휩쓸려 함께 떠내려간다. 처참하네. 엎드린 자세 때문인지 가슴이 답답하다. 예뻤는데. 소나기 정도는 버틸 것 같았는데. 장마는 못 이기겠지.
“내년에 또 피니까 상관없잖아."
등굣길의 이와이즈미가 불쑥 튀어나온다. 예쁘다며, 지면 안 될 텐데, 하고 걱정하는 오이카와에게 툭 던진 마디였다. 오이카와는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꽃을 바라보았다. 이와쨩, 단순해서 좋겠네. 하지만 오이카와 씨의 섬세한 감상은 그렇게 무식하지 않아요.
실은, 그건 수년 간 오이카와의 대사였다. 엑, 그래도 내년에 또 보면 되니까! 꼬마부터 새파란 중학생까지 오이카와는 내내 종알거렸다. 설렁설렁 넘어간 세월만큼 이와이즈미에게 그 말이 물들었나보다.
“뭐, 그렇지."
헤실거리며 이와이즈미를 놀리는 대신 순순히 수긍했다. 내년은 이제 한번 남았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풍성하게 핀 꽃들 사이에, 이르게 떨어진 꽃잎이 시선을 잡아끈다. 밟지 말라는 듯, 동정해달라는 듯 구걸조차 어여쁘다. 그러나 꽃이 예쁘다던 이는 일부러 그 모습을 짓밟았다. 너무나도 얇은 감촉은 운동화 밑창을 뚫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발밑이 올록볼록 괴상했다. 마치 시체를 밟고 선 것 같다.
여우비 예보
올해도 꽃은 당연한 듯 찬란한 자태를 틔웠다. 오이카와는 이번엔 사진을 찍었다. 예쁘다는 감탄 대신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연약한 꽃대를 흔든다. 이와이즈미와의 등굣길이 아닌,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에서.
“하지만 난, 토오루를 영원히 좋아할 건데."
저번 여자 친구는 퍽 순진했다. 하긴 2년 간 동경해왔다며 수줍게 말하며 봄날에 고백했으니까. 2년. 고백은 고맙지만 올해는 고3이고 배구부 주장이라 연애할 시간 따위 없고 애초에 널 좋아하지 않는다며, 나긋나긋 거절하려 했던 오이카와는 한순간 충동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이후 조금 후회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소중하게 성심성의껏 대해주려고 했는데.
“양껏 연애해도 감정은 딱 2년이래. 이렇게 보면 별 거 없지?"
민감한 단어에 반사적으로 말이 튀었다. 화풀이인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억지로 웃는 눈매가 가치 돋친 말과는 달리 상냥하다.
“하긴, 매분매초 사랑을 느끼면 곧 죽어버릴 걸."
그녀 말대로 오이카와는 정말 최악의 연인이었다. 헤어지고 우울하지도 않다는 게 가장 최악이다. 상처를 줬다는 어렴풋한 죄악감 뿐, 애타는 그리움 따위는 없었다. 나츠미 쨩, 내가 첫사랑이라고 했지. 세 음절이 마음을 찔렀다. 이젠 사과를 하고 싶지만 행여 여지를 줄까봐 오이카와는 생각을 물렸다. 대신 손을 뻗어 배구공을 품에 넣었다. 괘씸하게도 자신의 첫사랑이 머릿속을 메운다. 달콤했던 추억보다도 헤어지고 난 후가 더욱 기억에 남는다.
만날 때야 두근두근하지. 떨어지고 몇 달 지나면 아, 왜 그랬을까. 왜 그리 목매달았을까, 의문이 들걸?
뒤틀린 목소리 뒤로 건네지 못할 사과가 무릎으로 비척비척 기어 나온다. 나츠미 쨩, 미안해. 고개를 숙여 동그란 공에 턱을 올려놓았다. 이와이즈미가 고른 것이었다. 이제 영영 사라진 신제품의 고무냄새를 들이마신다.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은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내가 미안해.
오이카와 토오루의 첫사랑은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아니다.
그건 중대한 사실이었다. 만약 그가 첫사랑이라면, 오이카와는 여느 첫사랑처럼 우리 둘만은 특별하다고 믿으며 내달렸을 지도 모른다. 안타까울 정도로 무모한 돌진은 첫사랑의 특권이니까.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첫사랑이 아니었고, 그저 첫사랑을 잃은 오이카와 곁에 자리했을 뿐이다. 늘 그래 왔듯이.
오이카와는 지극히 섬세한 남자다. 첫사랑과 미련 없이 헤어지고도 감정이 시들어 형편없이 나뒹구는 걸 똑똑히 느꼈다. 괜찮아, 가볍게 사귄 건데. 그리 여겼는데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와이즈미가 어르고 달래고 등짝을 후려 팬 후에야 겨우겨우 삼킬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어느 새 완전히 괜찮아졌다. 예전처럼 이와이즈미와 등하교하고, 이와이즈미와 배구를 하고, 이와이즈미와 라멘을 먹으러 가고, 이와이즈미와 별이 뜬 밤하늘을 보고, 이와이즈미와……이와쨩과.
그게 문제였나. 처음에는 착각인 줄만 알았다. 상식적인 추론이다. 언제나 무얼 하나 붙어 다니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까. 연애 감정은 쉽게 질리고 다루기 성가시니까, 부 일지를 맡기는 것처럼 이와이즈미에게 맡겨버리는 거 아닐까. 이와이즈미에게 맡길 수 없는 건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으니까. 이와이즈미는 아주 듬직하고, 세상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라면 맘껏 사랑해주진 않더라도 매정하게 내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내가 질려서 먼저 버리더라도, 이와쨩은.
꾹꾹 눌러쓰던 한자가 어긋난다. 그럴 수는 없잖아. 짜증난 음성이 불거졌다. 바싹 불쾌를 곤두세운 손짓은 삐침을 깔끔하게 지우는 대신 찍찍 까만 선을 그어버린다.
이와이즈미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생각하는 만큼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싫어. 싫었다. 단지 그런 이기심이다. 자기 밖에 모르는 고작 그런 마음으로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좋아한다.
“졸지 말고."
“이와쨩은 꼭 수업 시간에 침 흘리면서."
“이게."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은데. 여자 친구 이야기도 꺼낼 수 있고 아무런 흑심 없이 살을 맞대는데. 종종 제가 오린 토스로 스파이크를 칠 때라던가, 이따 보자, 하고 인사하는 때라던가. 좋아하는 감정은 앞이 절벽인 것도 모르고 왈칵 넘쳐흘렀다. 네가 딱 잘라서 선을 그으면 좋을 텐데. 이와쨩 책임도 있어. 애꿎은 이와이즈미를 원망한다. 그럼 나, 연애감정 따위 이와쨩에게 맡길 엄두도 안 낼텐데.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떨떠름하게나마 받아주었다. 변덕스럽게 태도를 뒤집어도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지적하지 않는다. 키스를 해도 영영 내치진 않고 결국엔 받아 줄거야. 하지만 키스하지 않고 친구로 남아도 내 결혼식 축사를 해주겠지. 늘 이와이즈미에게 묻고 싶었다. 짝사랑 상대를 향한 모범질문은 아니겠지만. 이와쨩은 어느 쪽이 더 좋아? 어느 오이카와와 더 행복해? 답을 해줘. 나는 영영 모르겠어.
그럼에도 좋았다. 좋아하는 감정에 자기 혼자 질려버려서 그만두자고 다짐해도, 다음 계절이 되자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 묵직하게 울렸다. 열손가락을 쫙 펴도 그 계절을 다 못 셀 무렵, 꽃이 피고 비에 저무는 마지막 계절이 왔다. 마지막. 멋대로 붙인 단어가 지독하게 쓰다.
“감기 걸리면 네 탓이다."
“쌍방과실이지!"
비가 와도 너무 많이 왔다. 꼭 끌어안은 채로 하염없이 속삭이기엔 너무 추워서, 둘은 벤치에 앉기로 했다. 멍청한 꼴이었다. 본능적으로 체온을 찾아 허벅지를 딱 맞붙이고 앉았더니, 곧 비가 그치느니 아니라느니 옥신각신 바보 같은 언쟁이 시작된다. 언쟁은 애매한 순간에 딱 멎어버려서, 말문이 막힌 둘은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퍼석한 합의를 봤다. 소개팅 자리에서 처음 만난 커플도 아닌데 공백이 미묘하다. 아까 그쳐버린 포옹이 아쉬워서, 라는 이유가 제일 터무니없었다. 어색한 줄다리기를 하기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서로가 너무나 편하고 당연해서, 금방 이것저것 이야기를 쪼르르 풀어놓았지만.
너댓번째의 침묵 후에는 무게 추와 같았던 ‘아직도 비가 안 그치네’ 라는 그럴싸한 변명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금방 안 그친다는 오이카와가 옳았다. 아직도 비가 오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기다리다 지쳐 아까처럼 냅다 뛰었을 시간이 세 번은 되감아졌다. 풍경에 어두운 물감이 풀어지고 온도가 냉담하게 귀갓길을 재촉한다. 휴대폰이 있었지만 둘 모두 집에 연락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듯 손이 시리다. 그럼에도 시간만은 얼지 않은 채 자꾸만 손틈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꽤 좋은 추억이 되겠지. 빗속에서 멍청하게 달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끌어안고, 평소처럼 안 해도 좋을 대화를 나누고. 오이카와는 조용히 손바닥을 오므렸다. 비가 그치면 꽃이 지고,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시간은 애석하게 흐른다. 그것이 조금은 무서웠다. 사실은 많이도 두려웠다. 겁과 어둠을 집어삼키며 욕심이 몸을 불렸다. 그보다 훨씬 왜소한 평정심은 도무지 제멋대로인 그 감정을 담아둘 수가 없다. 정적 속에서 무언가 빵빵하게 부풀어져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오이카와는 마지막이란 단어에 결국 굴복한다. 원하는 것에 뻗는 손이 떨렸다.
시간은 잡지 못해도 못생긴 손은 잡을 수 있었다. 손 안의 이와이즈미는 굳었지만 그를 내팽개치진 않았다. 빤히 쳐다봤다. 온통 깜깜하고 흐릿한 가로등만이 주변을 비췄지만, 오이카와가 찾는 그 모습은 눈으로 더듬을 필요도 없이 또렷하다. 억지로 성가셔하는 표정. 애정에 숨가쁘게 쫓기는, 그럼에도 도망조차 가지 않는 그의 이와이즈미. 오이카와는 곧 이와이즈미가 한숨을 폭 쉬고 눈을 마주해주리라는 걸 알았다. 숨 한번 고르면, 봐, 이와쨩은 항상 어울려주지. 꼭 그 기대를 따라준 이와이즈미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빗소리에 제대로 된 사고의 잔가지가 형편없이 부서진다. 서서히, 놀라지 않게, 그래도 거부할 수 없게, 한걸음, 숨 한자락…….
이와이즈미는 피하지 않았다. 피했으면 더 쉬웠을 터다. 욕심은 날짐승처럼 저항하지 않는 상대를 에워싸고 곁만 빙빙 돌았다. 결국 오이카와는 입술이 닿을락 말락할 때 고개를 뒤틀었다. 엇나간 고개가 보잘 것 없어서 숨죽여 울고 싶었다. 울음을 간신히 삼켜낸 목구멍이 마르고 혀가 포옹을 구걸할 때처럼 떨리고 있었다.
"도쿄는 거리마다 벚꽃나무가 있대."
"…"
"있지, 내년에는……."
꽃이 영영 안 피었으면 좋겠다.
그치, 이와쨩?
눈이 마주칠 각도였나, 의문이 싹틀 때 빗소리가 뚝 끊겼다. 한참동안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청각, 아니 모든 감각이 일순 작은 면적으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맞닿은 게 떨어지고 나서야 그게 입술인 걸 깨닫는다. 그제서야 빗소리가 들리고 이와이즈미가 보였다. 오이카와는 자신은 다가가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너, 이딴 식으로 굴다간 다신 여자 친구 못 사귄다."
반박을 하고 싶었다. 시원시원한 목소리는 오이카와와는 달리 태평하다. 언제나 입을 맞춰왔다는 듯이 굴면서, 정작 손은 벌벌 떨리고 있는 주제에. 평생 여자 친구 따위 안 생기는 건 이와쨩이라고 호기롭게 받아치고 싶었다. 그러나 둘은 방금 입을 맞췄다. 어린애 같은 사소한 스킨십은 때론 백 마디 말이 풀어낼 수 없는 복잡한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녹여버린다. 여태까지 마음속에 혼자서 단단히 쌓아올렸던 모든 것들이 그랬다. 수년 간 공들여 쌓아온 것을 이와이즈미는 기어코 와장창 무너뜨렸다. 오이카와는 어디 한 구석이 고장나버린 것처럼 말을 고를 수 없었다.
“이와……."
“오이카,"
“…으에, 에, 에취!"
젠장맞을 타이밍. 하필이면 기관지도 영 협조적이지 않다. 어쩌면 평소대로 나불대지 못하는 오이카와를 위해 연신 재채기를 쏟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으에취! 이와, 에취! 그 어지간한 모양을 바라보며 이와이즈미는 기가 찬 듯 허, 숨을 토해냈다. 터질 듯한 긴장은 이미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없다. 망설임 없이 허여멀건한 이마에 딱밤이 투하된다. 악!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듯 한 표정을 애써 가다듬고, 이와이즈미는 불쑥 말했다.
"우산 꺼내."
“…….”
"…가서 머리 말려 줄 테니까."
이젠 정말 꿀먹은 벙어리나 다름없다. 놀란 나머지 재채기까지 제 집을 찾아 슬그머니 기어들어갔다. 더듬거리며 가방 지퍼를 열려고 하자 아직도 서로 손을 붙들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옅은 고뇌를 알아차렸는지, 단단한 손아귀가 모난 구석 없이 풀어졌다. 오이카와는 가만히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아까까지 잡고 있던 손이 내밀어진다. 꿀꺽, 침을 삼키며 우산을 건네는 손짓이 죄 지은 어린애마냥 버벅거린다.
"이와쨩도 우산 갖고 다녀."
날씨, 변덕스러우니까. 투덜대지 말고 매일 갖고 다니면 되잖아? 뒤늦게 뱉은 변명이 스스로 듣기에도 참 얄궂다. 한참 전부터 불이 붙어 귓가가 등을 밝혀놓은 것 마냥 새빨갛다. 화끈화끈한 감각 탓에 오이카와는 자신의 상태를 아주 잘 알았다. 이와이즈미가 그것을 유심히 보고 있다는 것도. 시선을 떼고 우산을 팡! 펴는 손길이 제 것을 다루는 것 마냥 익숙하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옆에 끌어다가 무덤덤하게 우산을 기울여 주었다.
"네가 있는데 뭐 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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