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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른 전력 '소나기'





분실물




쩌렁쩌렁한 외침과 바닥을 때리는 스파이크의 타격음이 사라지자, 비로소 밑에 어둑하게 깔린 비 내음이 났다. 어슴푸레하던 시각에 낭랑하게 말을 읊던 리포터는 어김없이 틀렸다. 비 안 온다더니만. 소나기는 제법 길어서 짐을 싸고 집에 가는 발걸음이 시작될 때까지 이어졌다. 부칠에 비치한 우산을 삼 학년부터 챙기는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스타팅 멤버라는 이름만 번쩍이지 실상 권력 한줌 없는 일 학년은 얌전히 뛰어갈 판이다.

“우산 없어?"

어느새 옆에 다가온 물음이 다정해서, 또 그 다정함이 익숙해서 쿠니미는 눈을 의식적으로 깜빡였다. 있어요, 하고 거짓말 하기에는 이미 미묘한 틈이 생겨버렸다. 다른 선배였다면 뻔뻔하게 메웠을 아주 조그마한 간격. 쿠니미는 이와이즈미를 돌아보았다. 별것도 아닌데 일이 꼬여버린 기분이다. 집에 있는 우산이 순간 떠오른 탓이다. 쿠니미가 주의를 기울였다면 지금쯤 손에 있을 회색 접이식 우산이 아니다. 우산통이 아닌 방 한구석에 모셔놓은 남색의 장우산.

쿠니미 아키라의 집에는 누군가 잃어버린 분실물이 있다. 시원시원한 필체로 반듯하게 주인의 이름까지 적혀있는 우산이다.

고개는 태연하게 고정한 채로 시선만 밑을 훑는다. 집에 있는 것과 같은 색의 장우산이다. 선배는 그 색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언제나 장우산이고. 평소처럼 무심하게 말을 뱉는 대신 속으로 꼭꼭 씹었다.  



꽤 지겨운 구도였다. 쿠니미는 이와이즈미 앞에선 언제나 일 학년이고, 또 이와이즈미 역시 언제나 삼 학년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겹친 일 년. 쿠니미가 학교를 입학하면 이와이즈미는 학교에 빼곡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순식간에 흘러가는 1년 뒤에는 먼저 휙 자취를 감추게 되겠지. 그러니 중학생의 쿠니미 아키라는 조금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저 대사를 처음 들었으니까.

"우산 없어?"
“…."
“쓰고 내일 줘."

갓 열네 살이 된 후배가 멀뚱히 선배를 파악하는 것을 이와이즈미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 아래에서도, 쿠니미는 가만가만 참 정이 많구나 싶었다. 냉큼 빗속을 내달리는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딱히 따라 뛰어가서 붙잡진 않았지만.

다음 날 아침의 고민은 쿠니미의 뒷자락을 꾸욱 붙잡았다. 지각이 아슬아슬한 정도였다. 쿠니미는 미끌미끌한 그 감각을 뿌리치고 우산을 두고 왔다. 명백한 고의였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이와이즈미는 어제의 흔적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쿠니미에게 우산을 달라고 하지도 않고, 심지어 빗속을 내달린 주제에 그 흔한 감기 기운도 내비치지 않았다. 평소와 똑같이 왔냐고 등을 가볍게 두드려줄 뿐이었다. 쿠니미 아키라는 기분이 상했다. 스스로가 너무 유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유치한 고집은 몇 달 내내 이와이즈미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다, 결국 대답 없는 애꿎은 선배를 졸업식 때 놓쳐버렸다.

2년이 끔찍하게 느리게 지나고, 지망서의 '아오바죠사이'는 쿠니미에게 껄끄러운 이름이었다. 뻔한 선택이었는데도 자꾸만 쓸데없는 갈등이 마음을 휘저었다. 미숙한 오기가 우산에 적힌 이름을 신경질적으로 뇌리에서 지웠다. 분실물은 행여 누군가 실수로 쓰고 나갈까 봐 계속 방 한구석에 곱게 모셔져 있었다.


그래, 그때, 키다이치 때도 이와이즈미를 내려다봤는데. '이와이즈미 씨'는 남색 져지를 벗고 민트색 유니폼을 꿰어차도 여전히 자신보다 작다. 예상은 했지만. 멋대로 우산을 쥐여주려는 무책임한, 아니, 무고한 손목을 잡는다. 정말 하나도 기억 못하네요, 이와이즈미 씨.

손 안의 이와이즈미가 따듯하다. 반대로 제 피부는 시릴 거라 생각하니 넘보면 안될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유치한 감상이 이번에도 끈덕지게 쿠니미를 감싸려 할 때, 이와이즈미가 올곧게 그를 바라보며 기다려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쿠니미는 이 년간 질질 끌었던 첫걸음을 내디뎠다. 겨우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 행세를 한다.   

"괜찮으면 데려다주세요."

혼자 두고 훌쩍 달려가지 말라는, 고작 그런 애원이었다. 가능한 뻔뻔하게. 일부러 걱정 어린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선배라면 해줄 걸 알았다.


"비 맞으면 안 되잖아요."














=

뭘 쓴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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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스미, 와카토시!






예기치 못한 일이 있었다. 하다못해 세계 멸망이나 좀비 아포칼립스는 한 톨 정도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겼는데, 지금 닥친 상황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와이즈미는 우시지마와 함께 대학교에 진학했다. 오이카와와 우시지마가 같은 학교를 가는 악질적인 상상은 해본 적이 있었는데, 현실은 더욱 더 어처구니없게 이와이즈미의 뒤통수를 갈겼다. 당연히 도쿄로 갈 줄 알았던 우시와카는 미야기를 고수했고, 또 최근 들어 스파이커 포지션을 강화하려는 대학 스카우팅의 방침이었단다. 그런 거 알 게 뭐냐. 이와이즈미는 시큰둥하게 여전히 고요한 그 낯짝을 보았다. 대학 배구팀 첫 소집일에 우시지마는 예상 외로 곧장 이와이즈미에게 와서 아는 척을 했다. 까딱, 하고 숙여지는 고개가 오랫동안 마주하여 익숙하다. 행여 자신과 같은 색 져지를 꿰었다고 해도 말이다. 둘은 친하다고 하기에는 쌓인 앙금과 어색한 침묵이 있었고, 남남이라기엔 지나치게 인연이 많았다. 그런 성가신 걸림돌을 이와이즈미와 우시지마는 의외로 성큼 건너뛰었다. 본체 둘의 시원시원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고, 우시지마가 이와이즈미의 ‘동료’ 칭호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 거 알 게 뭐냐. 5년 간 이어져온 지긋지긋한 인연이라든지, 저 자식에게 져서 질질 짰던 밤이라든지, 어쨌거나 빌어먹을 우시와카는 이제 그와 한 배를 탔다. 원체 팀을 소중히 여기는 이와이즈미에겐 생각보다 거슬릴 것이 없었다. 그야 같은 팀이니까? 어찌되었거나 이제는 동료고. 

절친한 사이는 아니어도, 등을 두드리거나 물통을 건네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럴 때면 빠짐없이 묵직하게 실려 오는 시선에 이와이즈미가 점점 익숙해질 무렵, 자그마한 이변이 있었다. 해의 절반이 지나자 2군이었던 이와이즈미는 벤치 멤버로 선발되었고, 동일 군끼리 한 방을 써야 한다는 기숙사 규정에 따라 방을 옮겨야 했다. 거기에 또 예기치 못한 일이 있었다.

“도와주지."

불쑥 튀어나온 우시지마는 이와이즈미의 답을 듣기도 전에 커다란 상자를 가뿐하게 받아 들었다. 뭐야, 얘가 왜 이 방에서 나와? 학기 초에 첫 인사도 담담하게 받았던 이와이즈미는 지금은 정말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야, 너, 1013호? 여기 맞냐?"
“? 여긴 원래부터 내 방이었다."
“……아니, 계절부터 이 방 쓰냐고."
“당연한 것을 묻는군."

상자를 풀썩 옮기곤 다시 짐을 받으러 오지만 않았으면 무슨 안내로봇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평온한 음색이다. 저 망할 평정심. 우시지마는 여전히 멍청하게 입을 벌리며 짐 무더기를 들고 서 있는 이와이즈미에게 말했다. 친절하게도 눈짓을 주면서도, 넋 나간 룸메이트 대신 성실하게 짐을 옮기는 몸놀림은 멈추지도 않았다.

“저쪽이 네 침대다."

아, 그러세요……. 그런고로 1013호에는 애꿎은 명패가 걸렸다. ‘우시지마 와카토시’와 ‘이와이즈미 하지메’ 미야기에 위치한 대학인만큼 그 명패를 재미있어 하는 선수들만 한 무더기였다. 괜찮냐, 이와이즈미? 어쩌냐, 이와이즈미. 동급생이고 선배고 할 거 없이 복도에서 마주치면 어깨를 두드렸다. 젠장, 분명 타 지역 선수에게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거야. 이와이즈미는 3월에 그랬던 것처럼 한동안 격려에 파묻혔다. 정작 딱히 문제 될 것은 없다며 으쓱이는 어깨에 격려는 흘러내렸지만. 우시지마와의 동거는 퍽 순탄한 항해였다. 둘 다 깔끔한 운동부 체질이라 청소로 싸울 일은 없었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패턴도 조율이 좋았다. 중간 중간 오이카와에게 전화가 올 때 방에서 나와 통화를 해야 한다는 게 불편이라면 불편이었다.

“이와쨩 이번 룸메는 어때? 또 이상한 애는 아니지?"
“뭐…나쁘지는 않아."

정말 나쁘지 않았다. 1학기의 지저분한 룸메이트보단 오백 배는 더 바람직한 동거 상대다.

“우시와카쨩은? 엄-청 짜증나지 않아?"
“딱히."
“말도 안 돼!"

이래서 나와야 한다니까. 우시지마와 룸메이트라는 걸 아직도 오이카와에게 말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별 일도 아닌데, 쨍알거리며 말도 안 된다는 말을 스무 번도 더 들으면 될 일이었다. 오이카와의 성가심에 평생을 다져진 이와이즈미는 그 상황에 누구보다 익숙했다. 그래도 왜인지 말할 수가 없었다. 전화를 받으러 나가는 이와이즈미를 보는 소처럼 멀뚱한 눈을 마주하면 더더욱 그랬다. 왜 저 커다란 놈을 꿀단지처럼 숨기게 되는지, 스스로도 알쏭달쏭 의문이다. 행여 가끔 떨어져 있을 때 캠퍼스에서 마주치면 은근 애틋한 마음도 들고. 같이 살아서 가족처럼 여기기라도 하는 건가? 하긴, 저번 룸메이트가 끔찍하긴 했지. 코 푼 휴지로 침대를 수비하고 대뜸 방귀를 뀌는 전 룸메를 떠올리니 우시지마에게 순식간에 몰린 호감이 퍽 이해되었다. 딱히 나쁜 놈도 아니고, 청소도 재깍재깍하고. 암.





함께 방을 쓴 지 한 달이 되었다. 이와이즈미는 샤워 후에 수건을 갖다달라고 우시지마에게 부탁할 정도가 되었다. 이 단계가 온 것이다. 오프에 둘 다 외출하지 않은 밤, 금기시되던 알코올이 둘만의 방에 맹랑하게 발을 들였다. 새까만 비밀봉지에 청량한 색의 병이 한가득이다. 이와이즈미는 순간 우시지마에게 타박을 들을 것을 각오했다. 뺨을 긁으면서 슬쩍 봉지를 들어 올려 보이는 모습이 머쓱하다. 저 자식 안 먹는다고 하면 어쩌지. 아, 다른 애랑 마시면 되지 뭐. 쟤 은근 술도 약할 것 같고.

“이와이즈미."
“허?"
“네가 열려고 하는 건 땅콩이 아니라 프로틴 가루다."
“어,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는 발음을 혀가 아둔하게 뭉갠다. 새빨개진 눈꺼풀이 나른한 눈동자를 덮었다. 여전히 뭉툭한 손가락은 프로틴 가루를 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우시지마는 그 모양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바닥에 시치미를 뚝 떼고 놓여 있는 땅콩이 담긴 통을 들어올렸다. 고무로 된 뚜껑이 손쉽게 열린다. 땅콩을 집어 조그마한 입술에 톡 갖다 대니, 발갛게 물든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이와이즈미는 입을 벌려 앙, 하고 허공을 물었다. 땅콩은 혀 위로 얌전히 굴러들어갔으나, 손가락도 함께 이 사이에 물리다가 얇은 피부에 미끄러져 틈을 벗어난다. 촉촉하고 말캉한 감촉이 땅콩 대신 손가락을 문댔다. 그리 붉지도 않은 색이 비로소 시야에서 피어난다. 우시지마는 입술에 아슬아슬하게 얹어있는 손가락을 서서히 떼어냈다. 열이 오른 시야에서 그 놀림은 아주 아주 느리게 보였다.
 
“안 아프냐?"
“네 입술은 전혀 아프지 않다만."
“아니, 멍청아…스파이크 말이야……."

낯빛이 멀쩡한 우시지마와 한 시간 전부터 중얼중얼 의식의 흐름을 토해내며 프로틴 가루 통을 껴안고 있는 이와이즈미, 둘 중에서 멍청이에 가까운 건 단연코 후자였다. 평소 조절하며 딱 기분 좋을 정도만 마셨건만, 제 집이라고 생각하니 경계가 풀려 오히려 쭉쭉 들어갔다. 잔뜩 취한 웅얼거림에 진중한 끄덕임이 더해지니 진기한 광경을 이룬다. 대학의 에이스는 썩 충실한 말동무라, 술내 나는 헛소리에도 말대꾸를 해주다보니 대화에 끝이 없었다. 취한 이와이즈미의 화제가 이리저리 튕겨나가도 그걸 다시 제 방향으로 쳐내는 융퉁성 없는 화술이 오히려 능력이다.

“너 테이핑 안 하잖아……."
“단련되니 괜찮다."
“아, 그러셔."

속눈썹에 새까만 납을 칠한 듯 지탱하기가 점점 힘들다. 이와이즈미는 멍하니 생각하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제련되지 않은, 평소 낮은 곳에서 끓던 단상이 뚝뚝 덩어리로 떨어진다.

“네 스파이크 꽤 마음에 들어. 그리고……."
“?"
“부숴버리고 싶어."

우시지마는 문득 자신을 멎었다. 건너편의 이와이즈미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눈빛만은 멀쩡하다. 선전포고였다. 지겹도록 네트 건너편에서 매섭게 내려치던 그것이다. 수개월동안 팀워크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늘 다시 시커먼 그림자를 달곤 걸어 나온 것이다.

“그렇군."
“넌 어때?......별 생각 없겠지만."

선뜻 나온 응답에, 고개를 얕게 기울인 이와이즈미가 투덜거렸다. 이번엔 품에 안고 있던 통을 럼주 잔으로 착각이라도 해버렸는지, 호탕하게 입으로 가져가려는 이와이즈미를 반사적으로 저지한다. 통을 빼앗긴 뚱한 얼굴이 떠오른다. 매일같이 보는 얼굴인데도 시선이 발을 묶였다. 이와이즈미를 어떻게 생각하나. 우시지마는 잠시나마 언어가 손 틈새로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 말을 고르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일단 부숴버리고 싶지는 않다."
“이미 많이 해봤으니까?"

피식, 하곤 숨이 터졌다. 신랄한 어조지만 악의는 없는 게 느껴졌다. 세이죠의 세터와 함께 이를 부득부득 갈던 때와는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시라토리자와의 우시지마에게 목매달던 때는 다 과거라는 듯이, 아니, 이와이즈미에게는 명백한 과거였다. 우시지마는 그게 어쩐지 싫었다. 손도 못 써본 채로 모든 배역이 결정된 것만 같았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럼 뭔데."

빈 맥주 캔을 들어보며 남은 술을 찾는 손길은 이미 우시지마에게 흥미를 잃은 듯 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모양이 상대의 답을 기다려줄 여유 따윈 없는 것 같다. 수확을 얻지 못한 취객은 비척비척 일어나더니,

“나 잔다."

낮게 읊조리곤 근처 매트리스에 허리를 꺾어 낙하했다. 이와이즈미가 자신의 침대에 머리를 폭 박고 널브러질 때까지도 우시지마는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누구 하나 꿈쩍하지 않는 정지화면이 기숙사 내에서 재생된다. 우시지마는 일어나 조용히 이와이즈미에게 다가갔다. 부자연스럽게 엎어진 몸을 가뿐히 들어 올려 침대에 제대로 눕혀주었다.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주고, 불까지 꺼주고 나서야 뒤늦은 고민이 따랐다. 어디에 누워야 하는가?

우시지마는 건너편 이와이즈미의 침대를 바라보다, 이미 자리가 찬 제 침대를 돌아보았다. 고민은 그답게 후딱 매듭지어졌다. 우시지마는 자신의 침대에 몸을 올렸다. 혼자 쓰기는 넉넉한 침대였지만, 이와이즈미의 체격 역시 작은 편은 아니라 남은 공간이 그리 넓지 않았다. 딱 붙어 누워야 겨우 떨어지지 않는 정도다. 그래도 우시지마는 느릿하게 몸을 펴며 자리 잡았다. 허락 없이 남의 침대에 눕는 건 실례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누운 침대가 좁다. 평소보다 따끈하게 달아올라서 꼭 처음 눕는 침대 같았다. 무뚝뚝하던 온기가 색색 숨소리와 함께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옆을 데운다. 어둠 속에서 그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하고 맞붙은 살결에 저절로 호흡이 발을 맞췄다. 우시지마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여태까지는 맛보지 못한 만족이 곁을 채웠다.

날이 밝은 후, 이와이즈미는 왜 너와 내가 갓 결혼한 연인처럼 엉겨 붙어 잤냐고 따지지 못했다. 수업에 늦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시각에 우시지마가 깨우자, 퍼질러 자다가 비척비척 일어났을 뿐이다. 스스로가 누구 침대에서 일어나 시체처럼 욕실에 기어갔는지는 전혀 연연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우시지마는 숙취에 잔뜩 구겨진 감자 같은 얼굴을 멀뚱히 보다가, 친절하게도 허공을 헤매는 이와이즈미의 손바닥에 치약 따위를 올려주었다. 이와이즈미는 멍하니 거울을 노려보았다. 누군가 실수로 바싹 태운 것처럼 기억 한구석이 시꺼멓다. 심심한 건배를 연거푸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흘긋 옆을 보니 우시지마는 얌전하게 제 칫솔에다 치약을 짜고 있었다. 뭐 별일이라도 있었겠어. 그러곤 둘의 첫날밤은 얼렁뚱땅 넘어갔다.






다음 밤은 꽤나 뜨거웠다. 다른 게 아니라 이와이즈미가 말이다. 누워있는 이와이즈미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서늘하다. 아, 역시 이 구도는 자존심이 좀 상하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이번만은 그저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이즈미가 아프다. 탄탄한 이마부터 곧게 뻗은 쇄골까지 붉지 않은 곳이 없었다. 누군가 숨에 불을 붙인 듯 뜨겁다. 고집스럽게 억누른 신음을 끄집어내고 싶을 정도로, 이와이즈미는 마치 성냥처럼 재로 스러질 것만 같다.

유독 바쁜 하루에 뒤늦게 방에 들어온 우시지마가 이와이즈미부터 확인하는 것은 한 사람만이 눈치 채지 못한 오래된 습관이다. 왔냐는 탁한 목소리에 우시지마는 바로 이와이즈미가 아프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즉시 단호하게 등을 돌려 보건 팀에 연락하려고 옮기는 발걸음을 붙잡은 게 이와이즈미였다. 손목을 감싼, 자신보다 자그마한 손바닥에 열이 끓었다. 다급한 기색에 반동이 생겨 상체가 휙 돌아간다.

“하룻밤이면 나아."
“…"
“시합 나가야 해. 연락하지 마."

팀 규정상 보건기록이 생기면 그 다음날은 시합출정이 금지된다. 이와이즈미는 미련하게 그걸 피하려는 것이다. 앙다문 입술에 아집이 엉겨 붙어 있다. 정규 스타팅 멤버가 아닌지라, 원정시합에서 스타팅을 맡는 이번 시합은 이와이즈미에겐 귀중한 기회였다. 물론 우시지마가 납득할 수 있는 변명은 아니었다. 우시지마의 눈매가 험악하게 날을 세웠다.

“컨디션 조절도 못한 채로 시합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
“기본도 못할 줄이야, 실망이군. 이와이즈미."

거침없이 말이 쏘아진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기에 이와이즈미는 이를 부득 갈았다. 어릴 적부터 항상 이맘 때 즈음에 하루만 아파왔다던가, 원체 체질상 열로 앓아누우면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던가, 수많은 해명이 억울한 심정에 손톱을 세웠다. 구구절절 읊기엔 대응하는 우시지마가 강경하여 치기어린 자존심이 빳빳하게 허리를 세웠다. 저 무심한 질타에 걱정이 섞여 있다는 것을, 이와이즈미는 우시지마 보다 더 잘 알았다. 그럼에도 이와이즈미는 우시지마를 잡아야했다. 맞서는 끓는 목소리가 차분하다.

“부탁이다."

온전히 제 고집이다. 목울대가 잠시 떨어졌다 다시 둥글게 뭉쳤다.

"……와카토시."

한마디에 단단한 응어리가 똑똑 녹아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와이즈미는 괜히 자신이 비겁한 수를 쓴 것만 같았다. 거 봐, '이와이즈미 효과'야. 와카토시는 묘하게 너한테 무르다니까? 네가 이름이라도 부르면 뭐든 해줄걸? 팀 선배의 목소리가 귓바퀴에서 통통 튀었다. 설마요. 딱 잘라 대답했던 주제에 이와이즈미는 방금 물렁해 보이는 급소를 찔렀다. 오래된 죄책감 때문인지, 룸메이트에 대한 애착 때문인지 우시지마는 간간히 이와이즈미에게 제 고삐를 쥐어주었다. 전자는 분명 아니겠지. 뚱하니 생각하면서도, 바라보면 눈이 마주치고 무얼 찾으면 건네주는 손길이 썩 나쁘지 않다. 나쁜 의도가 아니면 되었지, 뭐. 그렇게 무심하게 물 흐르듯 넘겼는데. 평소 ‘우시지마’, 하곤 성으로 고집해서 부르던 혀가 까끌하다. 저리도 부드러운 눈길로 쳐다볼 줄 알고 여태 자제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름 한 자락에 순식간에 바뀐 눈빛이 간지러웠다. 그래서 괜히 말을 얹는다.

“대신 찬물 한 잔 떠주면 더 좋고."

그 말에 에이스는 바로 등을 보인다. 이대로 탈출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방 한구석의 정수기에 다가가서 곧장 물을 떠오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순진하게 따르면 도리어 이와이즈미가 민망해진다. 물을 떠온 룸메이트가 처음 만화영화를 본 어린애마냥 뚫어져라 쳐다봐서, 이와이즈미는 부러 꿀꺽꿀꺽 요란하게도 물을 넘겼다.

“또?"

낮은 음절이 우스운 소꿉놀이의 시작을 알렸다. 촌극이 따로 없었다. 한 명이 더 없이 진지하고 다른 한 명이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는 것이 특히 그렇다. 이와이즈미는 착실하게 짜인 물수건에 기분 좋은 신음을 냈다. 역시 힘은 좋네. 기특하다, 우리 에이스. 몸이 무겁지만 않았으면 흔쾌히 어깨를 도닥였을 터다. 짤막한 간호가 마무리 된 줄 알고 눈을 감고 있으니, 얼마 있지 않아 룸메이트는 이와이즈미 위에 그림자를 끌고 온다. 데운 레토르트 죽, 시판된 해열제와 물, 그리고 생뚱맞게 부채였다. 이와이즈미는 장신의 남자와 상대적으로 오밀조밀한 문병객들 사이에 엉뚱한 물체를 노려보았다. 허? ‘더워보여서’라는 진중한 답변에, 기가 찬 숨이 터지다가 이윽고 웃음이 뒤이어 해쳐 나왔다. 오죽 세차게 그를 비웃었는지 얼마 못 가 기침으로 바뀌어 무시무시한 ‘걱정되는 눈망울’을 봐야 했다. 귀빈처럼 물을 받아마시곤 다시 죄다 뿜어내며 이어 웃는게 아주 예의 없었지만, 우시지마는 묵묵하게 자신만의 간호를 준비할 뿐 저지하진 않았다.

뚝 떨어진 열이 졸음이라는 그림자를 남겼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커튼을 걷은 창밖이 새까맣다. 우시지마가 무뚝뚝하게 자리를 지킨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이와이즈미는 아직도 머리맡을 지키는 인영이 있다는 걸 깨닫고, 밀려들어오는 수마를 힘겹게 밀어내며 입을 뗐다. 처음보다 훨씬 편해진 숨과 함께 나온 목소리는 어찌할 도리 없이 다정하다.

"너도 어서 가서 자라."
"난 내일은 시합이 없다."
"컨디션 어찌구 하면서 잔소리할 때는 언제고."
"…열도 안 떨어진 선수에게 들을 말은 아니다."
“어쭈?"

편하게 오고가는 대화가 신기하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옆에서 그렇게 보고 있으면 잠이 안 오는데……. 시야가 감감하게 흐려진다. 앙다문 입술이 보이고, 얼굴이 훌쩍 높아지고 일순 사라졌다. 이와이즈미는 괜스레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아쉽지 않으면 거짓말이다. 사라진 우시지마가 스위치를 눌렀는지 방을 비추던 하얀 형광등이 꺼졌다. 생소한 하루가 점멸한다. 이와이즈미가 잘 자라고 인사하려는 순간, 침대 반대편에 무게가 실렸다. 우시지마가 같은 침대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뭐하냐고 물으려다가 이번엔 옆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눈을 꾸욱 감는다. 한창 괴롭혔던 감기가 발을 놀려 떠나며 노곤하게 감각을 풀었다. 아무래도 좋겠지…….

"그래…자라.“


진실로 이와이즈미의 회복력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팡팡! 이와이즈미가 스파이크를 때릴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체육관을 메웠다. 점수가 새롭게 덧대고 환호성이 불을 지핀다. 우시지마는 시합을 전반적으로 파악하면서도 노골적으로 한 선수에게만 신경을 쏟았다. 시합이 마무리 되자마자 그 대상이 바로 관중석에 서있던 우시지마를 돌아보았다. 이와이즈미는 경기에 임할 때 경기 외의 요소에는 일절의 관심도 주지 않는다. 그 철칙은 우시지마가 더 광적으로 지켰기에 잘 알았다. 그래서인지, 우시지마가 자신을 편애했는지도 모르면서 경기 후에 바로 찾아주는 그 고갯짓에 마음이 실린다. 손쉽게 눈이 마주치자 한 사람만을 향한 미소가 호쾌하게 터진다. 우시지마는 어느 반응도 되돌려주지 않았다. 되돌려 줄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단순히 이겨서 기쁜 게 분명했지만, 그렇다 해도 어젯밤 간호에 대한 보답으로 차고 흘렀다. 이와이즈미는 금방 다른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머리통이며 등허리에 칭찬을 한가득 받았다. 정렬하려는 깔끔한 발돋움을 새로운 각도에서 본다. 우시지마는 관중석의 보호턱을 가만히 쥐었다. 1년 전, 이곳에 서서 꺅꺅 거리며 ‘오이카와’를 외치던 소녀들이 새삼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시지마, 자신이었다면 다른 이름을 불렀으리라는 천진한 생각이 잠시간 고인다. 올곧은 흐름은 곡선의 것보다 유속을 띄운다. 생각이 세차게 흘러 다짐을 새겼다.







기어코 돌아온 동침은 여태까지와는 상이했다. 우시지마가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그걸 고백이라고 부르기엔 여러모로 어폐가 있었지만……그래, 경기라고 부르자. 둘 사이의 대화는 시합에 가까웠다.

“이와이즈미, 좋아한다."

우시와카 선수! 역시나 초반부터 대뜸 강력한 서브를 날립니다!

“어, 나도 너 나쁘진 않아."

의도치 않게 능숙하게 리시브하는 이와이즈미 선수! 이야, 저걸 어떻게 올리나요. 경이롭기만 합니다!

“그럼 사귀도록 하지."

다이렉트!!! 코트 안쪽으로 꽉 찬 돌직구를 내리꽂습니다!! 저쪽 찬스 볼로 띄웠나보군요. 역시나 우시지마 선수, 아주 여러 의미로 대단합니다!

“뭐? 너 게이였냐? 난 게이 아냐."
“안 해보면 모르지 않나."
“…"

리시브하기 애매한 위치군요!

“노력해봤다."
“……야."
“네 생각이 떠나지 않아."

처음 듣는 매달리는 어조에 리시브가 튕겨나갑니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 속에, 이와이즈미는 스스로만을 마주했다. ‘그’ 우시와카가 나를 좋아한다고? 현실이 금방 꿈이나 장난으로 치부된다. 그럼에도 이와이즈미가 얼어붙은 이유는, 우시지마가 그에게 건네 왔던 모든 말이 진실로 투명했기 때문이다. 그 투명함을 화를 태우기도 했고, 믿음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말로 표현 못할 깊은 곳에 말간 숨을 불어넣은 적은 없었다. 바닥을 딛고 선, 몸을 감싼 유니폼의, 그 모든 감각들이 등 뒤로 흐려진다. 우시지마가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담담하게 고백한 이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이와이즈미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눈을 맞췄다. 아무리 느리게 눈을 깜빡여도 선이 굵은 얼굴이 선명하다.

“이와이즈미.”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졌다.


“같이 자자고?"

베개를 꼭 끌어안은 우시지마 앞에서 이와이즈미는 입을 벌렸다. 이 상황이 어이가 없거니와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본 자신의 감상은 더더욱 납득이 안 갔다. 아 젠장… 이거 귀여워 보여. 귀엽다고? 미친 거다 이와이즈미! 저놈에게 휘말려 기어코 미친 거다! 고등학생 때보다 더욱 거대해진 장신의 사내놈을 보고 귀엽다라니, 저 자식에게 감화되어 함께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었다. 와르르, 하고 마음의 단단한 담이 무너지는데 그게 또 나쁘지 않은 울림인 게 더더욱 문제였다. 망했군……. 일단 침착해야 한다. 여기서 이 자식한테 넘어가면 경기의…아니 연, 연애의 흐름을 내주게 될 거야. 이와이즈미는 우시지마가 베개대신 배구공이라도 쥔 것 마냥 경계어린 눈을 했다. 참담한 심정을 애써 다잡아 외면하곤, 무심하게 거절을 툭 던진다.

“내가 나 좋다는 애랑 쉽게 자겠냐?"
“그럼 누구랑 자지?"

……젠장, 말문이 막히네.

“하지메."

한 자 한 자 꾹꾹 눌린 이름에 이와이즈미는 더더욱 물러설 곳이 없었다. 과연 대형 에이스답게 응용력도 뛰어나다.

"…그럼 팔베개해줘."

자 이정도면 거절해라. 이만하면 물러나는 거다, 우시와카! 그러나 우시지마는 이와이즈미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고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곤 침대 위로 올라왔다. 묵직한 존재감이 이와이즈미의 이부자리를 차지한다. 단단한 팔이 베갯머리에 쭉 펼쳐 얹어졌다. 코너에 몰린 침대의 주인이 보기엔, 이젠 우시지마가 묘하게 의기양양한 기색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떨떠름하게 뺨을 가져다 댔다. 살갗 위에서 체향이 호흡에 섞여들었다. 아, 저놈의 아이컨택 부담스럽다고. 다른 사람의 눈짓이 버드키스라면 우시지마의 것은 단연 딥..딥키스였다. 민망한 비유를 떠올린 이와이즈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시선을 영영 피하지는 않는다. 투덜거림과는 달리 이미 수개월동안 저 진득한 눈맞춤에 익숙해졌다.

"야, 너…괜찮냐……. 나 진짜 잔다? 팔 저려도 몰라?"
"난 왼손잡이니까 괜찮다."

아, 그러세요……. 오히려 근육 때문에 불편한 건 자신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안정감이 있어 괜한 반발심이 들었다. 우시지마를 향했던 고개를 바로 놓으니, 뺨을 찌르는 시선이 따갑다. 저런 올곧은 관심을 누구나 하루종일 쬐고 있는다면 면역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와이즈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감으며 나직하게 툭 말을 던졌다.

"나 침도 흘리면서 자는데?"
“귀엽군."

뭐라는 거지 이 새끼가?! 이와이즈미는 하마터면 우시지마의 머리통을 배구공 삼아 스파이크를 때릴 뻔 했다. 흠칫, 제 손을 꾹 말아쥔다. 오이카와만을 때린다는 신조가 박살날 뻔 했어. 우시지마는 왜인지 팔뚝과 맞닿은 뺨이 뜨겁다고 느꼈다. 또 아픈건가. 커다란 손바닥이 나머지 뺨을 살며시 감쌌다. 이와이즈미는 바싹 굳었다. 언뜻 숨이 목구멍에서 빵빵히 배를 불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으아아악!!”
“?”

억지로 소리를 질러서 토해낸다. 가슴팍이 들썩인다. 물음표가 떠있는 우시지마의 표정을 보니 이젠 목덜미까지 열이 빠르게 옮겨붙었다. 뺨 위에 사뿐히 얹힌 손바닥은 여전했다. 언제 그렇게 험악한 스파이크를 했냐는 듯 무게가 천연덕스럽다. 이와이즈미는 뭔지는 몰라도 이게 자신에게 해롭다는 걸 느꼈다. 잠은 쥐새끼마냥 재빨리 달아난 지 오래였지만 오기로 눈을 꾹 감는다. 도리어 감촉이 선명해진다.

“어서 자기나 해라, 우시와카.”
“와카토시.”
“……와카토시.”

우시지마는 이와이즈미의 뺨을 가볍게 쓸곤 무심하게 이불 위로 손을 옮긴다. 제 위로 단단한 팔이 머뭇거리며 얹혀진다. 뿌리칠 타이밍이 손 틈새로 사라지는 걸 느꼈다. 젠장. 두근두근 머리가 울려 상대가 알아차릴까 긴장이 된다. 지금 와서 발을 물리기는 자존심이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이대로 자려니 자신은 그 와카토시의 팔을 베고 있다. 아, 다신 얘랑 자나 봐라. 이와이즈미는 다짐을 짓씹었다. 

근데 빌어먹게도 포근하네. 

어둠 속에서 숨이 섞인다. 커다란 품에 안긴 작은 짐승처럼 평소엔 바싹 선 긴장이 자꾸만 게으름을 피웠다. 이미 눈을 감은 상태인데도 연거푸 눈이 감기는 걸 느꼈다. 바닥 없는 온순한 밤이 서서히 내리고, 이따위의 동침이 앞으로도 쭈욱 이어지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침상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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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한두 방울 떨어질 때는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며칠 째 어두침침하다. 오이카와는 아빠다리를 한 채 책상 앞에서 팔을 포개고 있었다. 지겹게도 내리네. 포갠 팔에 고개를 파묻고 창밖을 떠올린다. 지독한 장마에 꽃잎이 죄다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곧 빗물이 세차게 흐르면, 그 물줄기에 휩쓸려 함께 떠내려간다. 처참하네. 엎드린 자세 때문인지 가슴이 답답하다. 예뻤는데. 소나기 정도는 버틸 것 같았는데. 장마는 못 이기겠지.

  

 “내년에 또 피니까 상관없잖아."

  

 등굣길의 이와이즈미가 불쑥 튀어나온다. 예쁘다며, 지면 안 될 텐데, 하고 걱정하는 오이카와에게 툭 던진 마디였다. 오이카와는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꽃을 바라보았다이와쨩, 단순해서 좋겠네. 하지만 오이카와 씨의 섬세한 감상은 그렇게 무식하지 않아요.

  

 실은, 그건 수년 간 오이카와의 대사였다. , 그래도 내년에 또 보면 되니까! 꼬마부터 새파란 중학생까지 오이카와는 내내 종알거렸다. 설렁설렁 넘어간 세월만큼 이와이즈미에게 그 말이 물들었나보다.

  

 “, 그렇지."

  

 헤실거리며 이와이즈미를 놀리는 대신 순순히 수긍했다. 내년은 이제 한번 남았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풍성하게 핀 꽃들 사이에, 이르게 떨어진 꽃잎이 시선을 잡아끈다. 밟지 말라는 듯, 동정해달라는 듯 구걸조차 어여쁘다. 그러나 꽃이 예쁘다던 이는 일부러 그 모습을 짓밟았다. 너무나도 얇은 감촉은 운동화 밑창을 뚫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발밑이 올록볼록 괴상했다. 마치 시체를 밟고 선 것 같다.

  

  

  

 

 

  

여우비 예보

  

  

 

 

 

  

 올해도 꽃은 당연한 듯 찬란한 자태를 틔웠다. 오이카와는 이번엔 사진을 찍었다. 예쁘다는 감탄 대신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연약한 꽃대를 흔든다. 이와이즈미와의 등굣길이 아닌,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에서.

  

 “하지만 난, 토오루를 영원히 좋아할 건데."

  

 저번 여자 친구는 퍽 순진했다. 하긴 2년 간 동경해왔다며 수줍게 말하며 봄날에 고백했으니까. 2. 고백은 고맙지만 올해는 고3이고 배구부 주장이라 연애할 시간 따위 없고 애초에 널 좋아하지 않는다며, 나긋나긋 거절하려 했던 오이카와는 한순간 충동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이후 조금 후회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소중하게 성심성의껏 대해주려고 했는데.

  

 “양껏 연애해도 감정은 딱 2년이래. 이렇게 보면 별 거 없지?"

  

 민감한 단어에 반사적으로 말이 튀었다. 화풀이인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억지로 웃는 눈매가 가치 돋친 말과는 달리 상냥하다.

  

 “하긴, 매분매초 사랑을 느끼면 곧 죽어버릴 걸."

  

 그녀 말대로 오이카와는 정말 최악의 연인이었다. 헤어지고 우울하지도 않다는 게 가장 최악이다. 상처를 줬다는 어렴풋한 죄악감 뿐, 애타는 그리움 따위는 없었다. 나츠미 쨩, 내가 첫사랑이라고 했지. 세 음절이 마음을 찔렀다. 이젠 사과를 하고 싶지만 행여 여지를 줄까봐 오이카와는 생각을 물렸다. 대신 손을 뻗어 배구공을 품에 넣었다. 괘씸하게도 자신의 첫사랑이 머릿속을 메운다달콤했던 추억보다도 헤어지고 난 후가 더욱 기억에 남는다.

  

 만날 때야 두근두근하지. 떨어지고 몇 달 지나면 아, 왜 그랬을까. 왜 그리 목매달았을까, 의문이 들걸?

  

 뒤틀린 목소리 뒤로 건네지 못할 사과가 무릎으로 비척비척 기어 나온다. 나츠미 쨩, 미안해. 고개를 숙여 동그란 공에 턱을 올려놓았다. 이와이즈미가 고른 것이었다. 이제 영영 사라진 신제품의 고무냄새를 들이마신다.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은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내가 미안해

  

  

  

 오이카와 토오루의 첫사랑은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아니다.

  

 그건 중대한 사실이었다. 만약 그가 첫사랑이라면, 오이카와는 여느 첫사랑처럼 우리 둘만은 특별하다고 믿으며 내달렸을 지도 모른다. 안타까울 정도로 무모한 돌진은 첫사랑의 특권이니까.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첫사랑이 아니었고, 그저 첫사랑을 잃은 오이카와 곁에 자리했을 뿐이다. 늘 그래 왔듯이.

  

 오이카와는 지극히 섬세한 남자다. 첫사랑과 미련 없이 헤어지고도 감정이 시들어 형편없이 나뒹구는 걸 똑똑히 느꼈다. 괜찮아, 가볍게 사귄 건데. 그리 여겼는데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와이즈미가 어르고 달래고 등짝을 후려 팬 후에야 겨우겨우 삼킬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어느 새 완전히 괜찮아졌다. 예전처럼 이와이즈미와 등하교하고, 이와이즈미와 배구를 하고, 이와이즈미와 라멘을 먹으러 가고, 이와이즈미와 별이 뜬 밤하늘을 보고, 이와이즈미와……이와쨩과.

  

 그게 문제였나. 처음에는 착각인 줄만 알았다. 상식적인 추론이다. 언제나 무얼 하나 붙어 다니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까. 연애 감정은 쉽게 질리고 다루기 성가시니까, 부 일지를 맡기는 것처럼 이와이즈미에게 맡겨버리는 거 아닐까. 이와이즈미에게 맡길 수 없는 건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으니까. 이와이즈미는 아주 듬직하고, 세상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라면 맘껏 사랑해주진 않더라도 매정하게 내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내가 질려서 먼저 버리더라도, 이와쨩은.

  

 꾹꾹 눌러쓰던 한자가 어긋난다. 그럴 수는 없잖아. 짜증난 음성이 불거졌다. 바싹 불쾌를 곤두세운 손짓은 삐침을 깔끔하게 지우는 대신 찍찍 까만 선을 그어버린다.

  

 이와이즈미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생각하는 만큼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싫어. 싫었다. 단지 그런 이기심이다. 자기 밖에 모르는 고작 그런 마음으로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좋아한다.

 

  

  

  

  

  

 “졸지 말고."

 “이와쨩은 꼭 수업 시간에 침 흘리면서."

 “이게."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은데. 여자 친구 이야기도 꺼낼 수 있고 아무런 흑심 없이 살을 맞대는데. 종종 제가 오린 토스로 스파이크를 칠 때라던가, 이따 보자, 하고 인사하는 때라던가. 좋아하는 감정은 앞이 절벽인 것도 모르고 왈칵 넘쳐흘렀다. 네가 딱 잘라서 선을 그으면 좋을 텐데. 이와쨩 책임도 있어. 애꿎은 이와이즈미를 원망한다. 그럼 나, 연애감정 따위 이와쨩에게 맡길 엄두도 안 낼텐데.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떨떠름하게나마 받아주었다. 변덕스럽게 태도를 뒤집어도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지적하지 않는다. 키스를 해도 영영 내치진 않고 결국엔 받아 줄거야. 하지만 키스하지 않고 친구로 남아도 내 결혼식 축사를 해주겠지. 늘 이와이즈미에게 묻고 싶었다. 짝사랑 상대를 향한 모범질문은 아니겠지만. 이와쨩은 어느 쪽이 더 좋아? 어느 오이카와와 더 행복해? 답을 해줘. 나는 영영 모르겠어.

  

그럼에도 좋았다. 좋아하는 감정에 자기 혼자 질려버려서 그만두자고 다짐해도, 다음 계절이 되자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 묵직하게 울렸다. 열손가락을 쫙 펴도 그 계절을 다 못 셀 무렵, 꽃이 피고 비에 저무는 마지막 계절이 왔다. 마지막. 멋대로 붙인 단어가 지독하게 쓰다.

  

  

  

  

감기 걸리면 네 탓이다."

쌍방과실이지!"

  

비가 와도 너무 많이 왔다. 꼭 끌어안은 채로 하염없이 속삭이기엔 너무 추워서, 둘은 벤치에 앉기로 했다. 멍청한 꼴이었다. 본능적으로 체온을 찾아 허벅지를 딱 맞붙이고 앉았더니, 곧 비가 그치느니 아니라느니 옥신각신 바보 같은 언쟁이 시작된다. 언쟁은 애매한 순간에 딱 멎어버려서, 말문이 막힌 둘은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퍼석한 합의를 봤다. 소개팅 자리에서 처음 만난 커플도 아닌데 공백이 미묘하다. 아까 그쳐버린 포옹이 아쉬워서, 라는 이유가 제일 터무니없었다. 어색한 줄다리기를 하기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서로가 너무나 편하고 당연해서, 금방 이것저것 이야기를 쪼르르 풀어놓았지만.



너댓번째의 침묵 후에는 무게 추와 같았던 아직도 비가 안 그치네 라는 그럴싸한 변명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금방 안 그친다는 오이카와가 옳았다. 아직도 비가 오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기다리다 지쳐 아까처럼 냅다 뛰었을 시간이 세 번은 되감아졌다. 풍경에 어두운 물감이 풀어지고 온도가 냉담하게 귀갓길을 재촉한다. 휴대폰이 있었지만 둘 모두 집에 연락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듯 손이 시리다. 그럼에도 시간만은 얼지 않은 채 자꾸만 손틈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꽤 좋은 추억이 되겠지. 빗속에서 멍청하게 달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끌어안고, 평소처럼 안 해도 좋을 대화를 나누고. 오이카와는 조용히 손바닥을 오므렸다. 비가 그치면 꽃이 지고,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시간은 애석하게 흐른다. 그것이 조금은 무서웠다. 사실은 많이도 두려웠다. 겁과 어둠을 집어삼키며 욕심이 몸을 불렸다그보다 훨씬 왜소한 평정심은 도무지 제멋대로인 그 감정을 담아둘 수가 없다정적 속에서 무언가 빵빵하게 부풀어져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오이카와는 마지막이란 단어에 결국 굴복한다. 원하는 것에 뻗는 손이 떨렸다.

  

시간은 잡지 못해도 못생긴 손은 잡을 수 있었다. 손 안의 이와이즈미는 굳었지만 그를 내팽개치진 않았다빤히 쳐다봤다. 온통 깜깜하고 흐릿한 가로등만이 주변을 비췄지만, 오이카와가 찾는 그 모습은 눈으로 더듬을 필요도 없이 또렷하다. 억지로 성가셔하는 표정. 애정에 숨가쁘게 쫓기는, 그럼에도 도망조차 가지 않는 그의 이와이즈미. 오이카와는 곧 이와이즈미가 한숨을 폭 쉬고 눈을 마주해주리라는 걸 알았다. 숨 한번 고르면, , 이와쨩은 항상 어울려주지. 꼭 그 기대를 따라준 이와이즈미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빗소리에 제대로 된 사고의 잔가지가 형편없이 부서진다. 서서히, 놀라지 않게, 그래도 거부할 수 없게, 한걸음, 숨 한자락……. 

  

이와이즈미는 피하지 않았다. 피했으면 더 쉬웠을 터다. 욕심은 날짐승처럼 저항하지 않는 상대를 에워싸고 곁만 빙빙 돌았다. 결국 오이카와는 입술이 닿을락 말락할 때 고개를 뒤틀었다. 엇나간 고개가 보잘 것 없어서 숨죽여 울고 싶었다. 울음을 간신히 삼켜낸 목구멍이 마르고 혀가 포옹을 구걸할 때처럼 떨리고 있었다.

  

"도쿄는 거리마다 벚꽃나무가 있대."

""

"있지, 내년에는……."

  

꽃이 영영 안 피었으면 좋겠다. 

그치, 이와쨩?

  

눈이 마주칠 각도였나, 의문이 싹틀 때 빗소리가 뚝 끊겼다. 한참동안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청각, 아니 모든 감각이 일순 작은 면적으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맞닿은 게 떨어지고 나서야 그게 입술인 걸 깨닫는다. 그제서야 빗소리가 들리고 이와이즈미가 보였다. 오이카와는 자신은 다가가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 이딴 식으로 굴다간 다신 여자 친구 못 사귄다."

  

반박을 하고 싶었다. 시원시원한 목소리는 오이카와와는 달리 태평하다. 언제나 입을 맞춰왔다는 듯이 굴면서, 정작 손은 벌벌 떨리고 있는 주제에. 평생 여자 친구 따위 안 생기는 건 이와쨩이라고 호기롭게 받아치고 싶었다. 그러나 둘은 방금 입을 맞췄다. 어린애 같은 사소한 스킨십은 때론 백 마디 말이 풀어낼 수 없는 복잡한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녹여버린다. 여태까지 마음속에 혼자서 단단히 쌓아올렸던 모든 것들이 그랬다. 수년 간 공들여 쌓아온 것을 이와이즈미는 기어코 와장창 무너뜨렸다. 오이카와는 어디 한 구석이 고장나버린 것처럼 말을 고를 수 없었다

  

이와……."

오이카,"

으에, , 에취!"

  

젠장맞을 타이밍. 하필이면 기관지도 영 협조적이지 않다. 어쩌면 평소대로 나불대지 못하는 오이카와를 위해 연신 재채기를 쏟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으에취! 이와, 에취! 그 어지간한 모양을 바라보며 이와이즈미는 기가 찬 듯 허, 숨을 토해냈다. 터질 듯한 긴장은 이미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없다. 망설임 없이 허여멀건한 이마에 딱밤이 투하된다. !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듯 한 표정을 애써 가다듬고, 이와이즈미는 불쑥 말했다.

  

"우산 꺼내."

…….”

"가서 머리 말려 줄 테니까."

  

이젠 정말 꿀먹은 벙어리나 다름없다. 놀란 나머지 재채기까지 제 집을 찾아 슬그머니 기어들어갔다. 더듬거리며 가방 지퍼를 열려고 하자 아직도 서로 손을 붙들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옅은 고뇌를 알아차렸는지, 단단한 손아귀가 모난 구석 없이 풀어졌다. 오이카와는 가만히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아까까지 잡고 있던 손이 내밀어진다. 꿀꺽, 침을 삼키며 우산을 건네는 손짓이 죄 지은 어린애마냥 버벅거린다

  

"이와쨩도 우산 갖고 다녀."

  

날씨, 변덕스러우니까. 투덜대지 말고 매일 갖고 다니면 되잖아? 뒤늦게 뱉은 변명이 스스로 듣기에도 참 얄궂다. 한참 전부터 불이 붙어 귓가가 등을 밝혀놓은 것 마냥 새빨갛다. 화끈화끈한 감각 탓에 오이카와는 자신의 상태를 아주 잘 알았다. 이와이즈미가 그것을 유심히 보고 있다는 것도. 시선을 떼고 우산을 팡! 펴는 손길이 제 것을 다루는 것 마냥 익숙하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옆에 끌어다가 무덤덤하게 우산을 기울여 주었다.

  

"네가 있는데 뭐 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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